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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희극의 파편」43. 이상 - 실화 中

by 재준

"(이)상! 연이와 헤어지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상이 연이와 부부? 라는 것이 내 눈에는 똑 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못 보겠네."


"거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


이 S는, 아니 연이는 일찍이 S의 것이었다. 오늘 나는 S와 더불어 담배를 피우면서 마주 앉아 담소할 수 있다. 그러면 S와 나 두 사람은 친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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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밤 열 시부터 나는 가지가지 재주를 다 피워 가면서 연이를 고문했다.


24일 동이 훤-하게 터 올 때쯤에야 연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장구한 시간!(매우 긴 시간)


"첫 번 - 말해라."

"인천 어느 여관."

"그건 안다. 둘째 번 - 말해라."

"......"

"말해라."

"N빌딩의 S사무실."

"셋째 번 - 말해라."

"......"

"말해라."

"동소문 밖 음벽정."

"넷째 번 - 말해라."

"......"

"말해라."

"......"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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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 책상 서랍 속에는 서슬이 퍼런 내 면도칼이 있다. 경동맥을 따면 - 요물(연이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은 선혈이 댓줄기 벋치듯 하면서 급사하리라. 그러나?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사유해보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마흔세 번째 작품은 이상의 '실화'입니다.


비운의 천재 이상 작품을 또 들고 왔습니다.ㅎㅎ

<이전 이상 작품 1 >


내용은 정말 간단합니다.


제목처럼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나열한 소설인데요. 지금 화자는 동경에 와 있습니다. 12/23 오전, 그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S와 동침을 하는 그의 애인 연이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편지였는데요. 심란한 마음으로 그날 하루 주변 인물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워낙 이상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 엉뚱하게 중간중간 과거로 돌아가 회상하기도 합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이러합니다.


소설 내내 화자는 자꾸 죽고만 싶다고 하는데요. 그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며 읽다가 아하, 아마 이런 생각을 해서 그러나보다, 라고 할 때 '이런 생각'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1.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2.


꿈- 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앉아서 나는 듣는다.


"언더 더 워치 - 시계 아래서 말이에요, 파이브 타운스 - 다섯 개의 동리란 말이지요. 이 청년은 요 세상에서 담배를 제일 좋아합니다. - 기다랗게 꾸부러진 파이프에다가 향기가 아주 높은 담배를 피워 빽-빽 연기를 풍기고 앉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낙이었답니다."

(*C양이라는 소녀가 학교에서 배운 영국소설을 이상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야말로 동경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 치밀을 때 저 폐까지 쭉 - 연기나 들이켜지 않고 이 발광할 것 같은 심정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


"(생략, C양이 계속 설명한다.) 선생님! 소설 속 이 여자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지요. 좋아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은 - 남자는 행복되지요. - 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네. -담배가 다 탔는데 - 아이-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눈을 좀- 뜨세요.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네 - 무슨 생각 그렇게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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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고운 목소리도 다 있지. 십 리나 먼- 밖에서 들려 오는- 값비싼 시계소리처럼 부드럽고 정확하게 윤택이 있고 - 피아니시모- 꿈인가. 한 시간 동안이나 나는 스토리보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한 시간같이 길었지만 십 분- 나는 졸았나? 아니 나는 스토리를 다 외운다. 나는 자지 않았다. 그 흐르는 듯한 연연한 목소리가 내 감관을 얼싸안고 목소리가 잤다.

꿈- 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잔 것도 아니요 또 누웠던 것도 아니다.


3.



나는 그만 가야겠다.


"선생님(이것은 실로 이상 옹을 지적하는 참담한 인칭대명사다.) 왜 그러세요―— 이 방이 기분이 나쁘세요?(기분? 기분이란 말은 필시 조선말은 아니리라) 더 놀다 가세요―— 아직 주무실 시간도 멀었는데 가서 뭐 하세요? 네? 얘기나 하세요."


나는 잠시 그 계간유수(*시내 사이로 흐르는 물) 같은 목소리의 주인 C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C군이 범과 같이 건강하니까 C양은 혈색이 없이 입술조차 파르스레하다. 이 오사게(*둘로 갈라서 땋아 늘어뜨린)라는 머리를 한 소녀는 내일 학교에 간다. 가서 언더 더 워치의 계속을 배운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강사는 C양의 입술이 C양이 좀 회(*회충)배를 앓는다는 이유 외에 또 무슨 이유로 조렇게 파르스레한가를 아마 모르리라.

강사는 맹랑한 질문 때문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다시 제 지위의 현격히 높은 것을 느끼고 그리고 외쳤다.


"쪼꾸만 것들이 무얼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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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이는 히힝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모르기는 왜 몰라― 연이는 지금 방년(*여자 20세의 나이)이 이십, 열여섯 살 때 즉 연이가 여고 때 수신과 체조를 배우는 여가에 간단한 속옷을 찢었다. 그리고 나서 수신과 체조는 여가에 가끔 하였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다섯 해― 개꼬리도 삼 년만 묻어 두면 황모가 된다든가 안 된다든가 원―(* 속담 '개꼬리 삼 년 묻어도 황모 못 된다.' 사람 고쳐서 쓰는 것이 못된다와 비슷한 뜻.)


수신 시간에는 학감 선생님, 할팽(*요리) 시간에는 올드미스 선생님, 국문 시간에는 곰보딱지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이 귀염성스럽게 생긴 연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면 용하지."


"선생님, 선생님― 제 입술이 왜 요렇게 파르스레한지 알아맞히신다면 참 용하지."

연이는 음벽정에 가던 날도 R영문과에 재학중이다. 전날 밤에는 나와 만나서 사랑과 장래를 맹서하고 그 이튿날 낮에는 기싱과 호손(소설가들)을 배우고 밤에는 S와 같이 음벽정에 가서 옷을 벗었고 그 이튿날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같은 동소문(東小門) 밖으로 놀러 가서 베-제(*피크닉)했다. S도 K교수도 나도 연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S도 K교수도 나도 바보요, 연이만이 홀로 눈 가리고 야웅 하는 데 희대의 천재다.

연이는 N빌딩에서 나오기 전에 WC(*화장실)라는 데를 잠깐 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오면 남대문통 십오간 대로 GO STOP의 인파.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 연이가 저 이층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의 사무실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알아맞히면 용하지."


4.


아스팔트는 젖었다. 스즈란도 좌우에 매달린 그 영란 꽃 모양 가등도 젖었다. 클라리넷 소리도― 눈물에― 젖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안개가 자옥-히 끼었다.

영경 윤돈(*영국 런던)이 이렇다지?


"이상! 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쳤다. 법정대학 Y군, 인생보다는 연극이 더 재미있다는 이다. 왜? 인생은 귀찮고 연극은 실없으니까.


"집에 갔더니 안 계시길래!"

"죄송합니다."

"엠프레스에 가십시다."

"좋―지요."


ADVENTURE IN MANHATTAN에서 진 아서(미국의 흑백영화)가 커피 한잔 맛있게 먹더라. 크림을 타 먹으면 소설가 구보씨(소설가 박태원)가 그랬다― 쥐 오줌 내가 난다고. 그러나 나는 조엘 맥크리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

MOZART의 41번은 ‘목성(木星)’이다. 나는 몰래 모차르트의 환술을 투시하려고 애를 쓰지만 공복으로 하여 저윽히 어지럽다.

"신주쿠(新宿) 가십시다."

"신주쿠(新宿)라?"

"NOVA에 가십시다."

"가십시다 가십시다."


마담은 루바슈카(*술집 마담이 루바슈카라는 러시아 민족 의상처럼 이국적 느낌을 줌). 노바는 에스페란토. (*노바는 에스페란토어로 새롭다는 뜻.) 헌팅을 얹은 놈(*헌팅 캡 모자를 쓴 사내)의 심장을 아까부터 벌레가 연해 파먹어 들어간다. 그러면 시인 지용(*시인 정지용)이여! 이상은 물론 자작(*귀족)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겠습니다그려!

12월의 맥주는 선뜩선뜩하다. 밤이나 낮이나 감방은 어둡다는 이것은 고리키(* 막심 고리키)의「나그네」구슬픈 노래, 이 노래를 나는 모른다.



5.



"이 편지 받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는 따뜻한 방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 서."


이날 저녁에 부질없는 향수를 꾸짖는 것처럼 C양은 나에게 백국 한 송이를 주었느니라. 그러나 오전 1시(*편지를 받은 날 다음날 새벽) 신주쿠 역 폼에서 비칠거리는 이상의 옷깃에 백국은 간데없다. 어느 장화가 짓밟았을까. 그러나― 검정 외투에 조화를 단, 댄서― 한 사람. 나는 이국종(*외국 품종의) 강아지올시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또 무슨 방석과 걸상의 비밀을 그 농화장(*은밀한 생활에서의 진한 화장) 그늘에 지니고 계시나이까?


사람이― 비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외다그려! 나를 좀 보시지요?



어떤가요? 내용이 엄청나게 난해합니다..

이게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 건지, 속으로 망상하고 있는 건지,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만큼 무질서하고 비문법적이지 않나요? 그런데 그게 나름 이상 작품을 읽어나가는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원문 링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상은 천성적으로 불안하고 위태롭고 권태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이상은 기생과 함께 다방집을 운영했었던 적이 있죠. 그만큼 꽤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도 합니다. 글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ㅎㅎ

그래서 결국 이상이라는 화자가 죽고자 했던 이유는...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정신줄을 놓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2.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마음을 내려놓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편안한가요?


3. 휴머니즘의 단점이 무엇일까요?


4. 억압된 마음이 있나요? 그것은 해소해야 하나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소은은 깊은 숲속에서 세속을 피하고, 대은은 조정 안에서 속세를 피한다.



-동방삭



오늘의 음악입니다.



하이든 - Missa In Tempore Belli






만약 이상이 유튜브 뮤직으로 음악을 계속 들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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