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히 그는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의 불행에 고귀한 탈을 씌워 놓고 늘 인생에 한눈을 팔자는 것이었다.
이런 그가 한 소녀와 천변을 걸어가다가 그만 잘못해서 그의 소녀에게 대한 애욕을 지껄이고 말았다.
여기는 분명히 그의 음란한 충동 외에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강렬한 체취와 악의의 태만에 역설적인 흥미를 느끼느라고 그냥 그저 흐리멍덩하게 그의 애정을 용납하였다는 자세를 취하여 두었다. 이것을 본 그는 곧 후회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중의 역설을 구사하여 동물적인 애정의 말을 거침없이 소녀 앞에 쏟고 쏟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육체와 그 부속품은 이상스러울 만치 게을렀다.
소녀는 조금 왔다가 이 드문 애정의 형식에 그만 갈팡질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내심 이 남자를 어디까지든지 천하게 대접했다. 그랬더니 또 그는 옳지 하고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어서 소녀에게 하루라도 얼른 애인이 생기기를 희망한다는 둥 하여 가면서 스스럽게 구는 것이었다.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서른 번째 작품은 이상의 '단발'입니다.
비운의 천재 이상은 (1910.9.23 ~ 1937.4.17)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인, 소설가, 건축가로,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남자 주인공 '연'은 소녀 '선이'에게 사랑 고백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껄떡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소녀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오빠가 자신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 동경으로 떠나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게 되면서,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연'의 사랑을 받아주기로 마음 먹습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연'과 '선이'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 장면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그는 결코 고독 가운데서 제법 하수(손을 대어 사람을 죽이다. 여기선 자살을 의미함.)할 수 있는 진짜 염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체취처럼 그의 몸뚱이에 붙어다니는 염세주의라는 것은 어디까디든지 게으른 성격이요 게다가 남의 염세주의는 어느 때나 우습게 알려 드는 참 고약한 아이아욕의 염세주의였다.
죽음은 식전의 담배 한 모금보다 쉽다. 그렇건만 죽음은 결코 그의 창호를 두드릴 리가 없으리라고 미리 넘겨짚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다만 하나 이 예외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A double suicide.(한 쌍의 자살)
그것은 그러나 결코 애정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다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말고 서로서로 '스프링 보드'(도약판) 노릇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용할 것을 희망한다. 그들은 또 유서를 쓰겠지. 그것은 아마 힘써 화려한 애정과 염세의 문자로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세상을 속이고 일부러 자기를 속임으로 하여 본연의 자기를, 얼른 보기에 고귀하게 꾸미자는 것이다.
(생략,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그래? 그건 섭섭하군. 그럼 내 오늘 밤에 기념 스탬프를 하나 찍기루 허지."
소녀는 가벼이 흥분하였고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어 보이기만 하였다. 얼굴이 소녀가 상기한 탓도 있었겠지만 암만 보아도 이것은 가장 동물적인 동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승부를 가릴 때가 되었나 보다. 소녀는 도리어 초조해하면서 기다렸다. 즉 도박적인 성미로!
그가 과연 그의 훈련된 동물성을 가지고 소녀 위에 스탬프를 찍거든 소녀는 그가 보는 데서 그 스탬프와 얼굴 위에 침을 뱉는다.
그가 초조하면서도 결백한 체하고 말거든 소녀는 그의 비겁한 정도와 추악한 가면을 알알이 폭로한 후에 소인으로 천대해준다.
그러나 아마 그가 좀 더 웃길가는(질적으로 높은) 배우였던지 혹 가련한 불감증이었던지 오전 한 시가 훨씬 지난 산길을 달빛을 받으며 그들은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_.
어느날 그는 이 길을 이렇게 내려오면서 소녀의 3전 우표처럼 얄팍한 입술에 그의 입술을 건드려 본 일이 있었건만 생각하여 보면 그것은 그저 입술이 서로 닿았었다 뿐이지- 아니 역시 서로 음모를 내포한 암중모색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그리 부드럽지도 않은 피부를 느끼고 공기와 입술과의 따끈한 맛은 이렇게 다르고나를 시험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이 방 소녀는 그의 거친 행동이 몹시 기다려졌다. 이것은 거의 역설적이었다. 안 만나기는 누가 안 만나-하고 조심조심 걷는 사이에 그만 산길은 시가에 끝나고 시가도 그의 이런 행동에 과히 적당치 않다.
소녀는 골목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경칠 나 쪽에서 서둘러 볼까까지 생각하여도 보았으나 그는 그렇게 초조한 듯한데 그때만은 웬일인지 바늘귀만 한 틈을 소녀에게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느라고 그랬는지 걸으면서 그는 참 잔소리를 퍽 하였다.
"가령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을 상 찌푸르지 않고 먹어 보는 거 그래서 거기두 있는 '맛'인 '맛'을 찾아내구야 마는 거, 이게 말하자면 '패러독스'지. 요컨대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사상, 즉 중심이 있는 사상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돼 먹었거든, 지성- 흥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조롱할 수야 얼마든지 있지,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생활을 '리드'할 수 있는 근본에 있을 힘이 되지 않는 걸 어떡허나? 그러니까 선이나 내나 큰소리는 말아야 해. 일체 맹세하지 말자- 허는 게 즉 우리가 해야 할 맹세지."
(생략, 선이는 그에게 편지를 쓴다.)
오빠의 비장한 출발을 같이 축복하여 주어야겠지요. 저는 결코 오빠를 야속하게 여긴다거나 하지 않아요. 애정을 계산하는 버릇은 미움받을 버릇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세월'이오? 연께서 가르쳐 주셔서 참 비로소 이 '세월'을 느꼈습니다. '세월'! 좋군요.
단발했습니다. 이렇게도 흥분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냥 미워서 그랬습니다.
단발? 그는 또 한 번 가슴이 뜨끔했다. 이 편지는 필시 소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에게 의논 없이 소녀는 머리를 잘렸으니, 이것은 새로워진 소녀의 새로운 힘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 났다. 왜?
머리를 자를 때의 소녀의 마음이 필시 제 마음 가운데 제 손으로 제 애인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애인으로 하여금 저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하게 한, 말하자면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1인2역을 시킨 것에 틀림없다.
소녀의 고독!
혹은 이 시합은 승부 없이 언제까지라도 계속하려나- 이렇게도 생각이 들었고- 그것보다도 싹뚝 자르고 난 소녀의 얼굴- 몸 전체에서 오는 인상은 어떠할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그에게는 흥미 깊은 우선 유혹이었다.
끝. (조선문학, 1939년 4월, 6-13쪽)
어떤가요? 아아, 그것은 에로스인지 플라토닉인지.. ㅎㅎ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나에게 사랑은 목적인가요, 수단인가요?
2. 그의 계획과 사상은 계획적인가요, 즉흥적인 것인가요?
3. 소녀는 그의 관념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일까요, 그의 교조적인 태도를 싫어하는 것일까요?
4. 소녀는 왜 단발을 했을까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나 우울해서 빵 샀어.
-애인
오늘의 속담입니다.
눈치가 안는 암탉 잡아먹겠다
병아리를 까려고 알을 안고 있는 암탉도 잡아먹을 눈치, 무슨 엉뚱한 짓을 할 것 같은 사람을 뜻함.
패러독스, 패러독스.. 소녀의 단발, 그의 욕심, 한 쌍의 수어사이드, 도대체 삶을 영위하는 생각이란, 말하는 순간... 패러독스, 패러독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