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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의 파편」 번외 - 노래, 그 노래 하나 때문에

by 재준

사랑은 외기러기 외기러기 영자야

제대하는 그날까지 정조만은 지켜다오


저 별 보고 저 달 보니

이거 정말 미치겠구나

보고픈 영자 생각하니 사정도 하고 싶지만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시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접어두고 번외 편으로 돌아왔습니다.


희곡의 대사 한 조각, 장면 하나를 붙잡고 들여다보는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연재하며

저는 오래된 감정의 표면을 꾹꾹 눌러보고, 웃기면서도 아픈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파편을 감정적으로 응시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패턴의 방식은 어느 순간 정해진 틀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을 갖추는 건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스스로 갇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중간중간 번외편을 연재하여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고자 합니다.


‘희극’이라는 단어는 꼭 희곡이 아니라도 우리 삶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 번외편은, 그 흩어진 희극을 줍는 작은 산책입니다.
가볍고, 조금은 무계획적이며, 말보다 여운이 많은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웃을 준비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ㅎㅎ 그냥 바라보면 됩니다.


프로필 사진을 바꿨습니다. 근데 이제 말뚝가를 곁들인..



1. 노래 하나 때문에...




저는 해병대를 어떻게 처음 접했냐면... 노래로 접했습니다.


형이 일단 진성 해병대 출신이었습니다. 야구선수 출신에다가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람, 고향은 경상도, 사주에도 백호살이 끼어있어 호랑이의 기운을 풍기며 살던 사람이 어느 날부턴가 집에서 유튜브로 싸가(비공식 군가)를 크게 틀어놓고 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노래들이 너무 좋게 들리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군가라는 것이 묘하게 가슴을 울리고, 사기를 증진시키고 듣다보면 절로 몸이 들썩이는, 괜히 신이 나는 그런 힘이 있더라고요ㅎㅎ.

제 안에 뽕짝을 좋아하는 DNA가 탑재되어 있었던지, 어느새 그 옛날 노래들을 다 외우고 있던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부조리와 악습이 심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저는 해병대 근처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해? 라는 말을 하면서 병무청에 접속해 공군을 지원하기까지.. 왜 사서 고생을 해,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 한 켠에서 '그리운 영자 남겨두고 나만 홀로 떠나갑니다... 사랑은 외기러기, 외기러기 영자야...' 라는 가사가 맴돌기 시작하더니 지금의 그 안일한 결정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아서, 아니 그런 건 어찌됐든 지원만 해놓고 공군으로 가면 되잖아, 라는 생각으로... 한마디로, 그 낭만적인 '말뚝가' 가사가 저를 붙잡아놓고 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공군, 해병대 두 곳을 지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몇 주뒤, 해병대는 모병제의 형식이기 때문에 귀하는 '우선선발'이 되어 해병대에 최종 합격했다는 문자가 옵니다.

<말뚝가>


1.

이제 가면 해병대다

피와 땀의 포항땅이다

해병대의 훈련단은 포항에 있고 모든 훈련병은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운 영자 남겨두고

나만 홀로 떠나갑니다


사랑은 외기러기 외기러기 영자야


제대하는 그날까지

마음만은 지켜다오


2.

저 별 보고 저 달 보니

이거 정말 미치겠구나


보고픈 영자 생각나니

사정도 하고 싶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영자만을 위해서라면


힘겨운 군대생활

몸으로 때우렵니다


3.

언제 한번 집에 가나

짝대기 하나 아직 쫄따구


집에 가니 마누라 하는 말

여보 당신 왜 왔소


요즘 군대 좋다는데

예비군이 뭐가 좋은지


남자다운 해병생활

견디어 나가렵니다



제가 재밌어했던 가사는 3절입니다.


'짝대기 하나 아직 쫄따구'란 소리는 아직 계급이 이병(작대기 하나)인 걸로 추측이 됩니다.


약간의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부사관(직업군인)의 지원 제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부사관으로 임관하기 위해선(직업군인이 되기 위해선)

바로 부사관 후보생 신분으로 입대하는 것도 있지만

병사 신분에서 부사관으로 전환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즉, 일병에서 상병 쯤 되는 시기에 부사관 후보생으로 지원해 선발되어 일정기간 훈련을 받은 후 하사로 임관하는 방법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사가 이러합니다.


'집에 가니 마누라 하는 말'

'아니 왜 직업군인 안 하고 여전히 병사 신분으로 휴가를 왜 왔소?'

'요즘 군대 좋아졌는데 왜 병사로 전역해서 예비군이 되려고 하는 거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직업군인이 힘들긴 해도 나름의 공무원이고 병사들에 비해 월급도 많이 받고 나라 혜택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아내는 그것을 기대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ㅎㅎ


그리고 해병대에선 '기리까시'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빗겨치기'라는 뜻입니다. (일제의 잔재..)

일반 사병에서 부사관이 되는 방식을 말하는데,

(병사) 일병 계급장

(부사관) 하사 계급장


즉 일자 모양의 작대기를 꺾어서(빗겨쳐서) 부사관 계급장 모양으로 바꾼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좋은 의도의 용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병대는 기본적으로 악습과 부조리 집단의 상징인만큼,

병사들 중심으로 똘똘 뭉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복무하던 당시엔 그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간부(부사관이나 장교)는 적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학교로 예를 들자면,

학생들이 서로 뭉쳐서 선생님들의 말을 듣는둥마는둥 한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이나 행정관(교장 선생님이나 학부 선생님 같은) 같은 사람들의 말은 듣다가도,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린 하사, 소위(기간제 교사, 교생실습생, 발령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의 말은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끼리의 문화를 지킬 수 있거든요. (없어져야 할 악습입니다ㅠ)

그러니 병사에서 갑자기 하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배신자'의 축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 입장에선 왜 직업군인을 신청 안 했어?, 라고 말하지만

그 휴가 나온 어린 남편의 입장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보, 나 그렇게 할 순 없어... 맞아 죽어..'


이 가사 또한 순화된 버전입니다. 실제 가사는 군대라는 조직의 특수한 공간적 특성상,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실무 부대에 가보니,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군가였고 악습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거나 시대착오적인 가사라는 인식 때문에 실제로 부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2. 결국 빨간 명찰


아무튼 저는 그렇게 해병대에서 18개월의 병역 생활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는데 그건 차차 번외 편에서 가끔씩 연재하겠습니다.ㅎㅎ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나요?



하나 자랑할 만한 건 제 동기 중 로이킴이 있었습니다. 저희끼린 '상우형'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악수도 해봤고, 밥도 퍼줬습니다. 훈련병들은 돌아가면서 배식을 하게 되는데 (저는 밥 배식 담당) 항상 제 쪽으로 와서 밥을 받아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마워요~'하고 가더랬죠.. 마지막날에는 아마 그때 당시 신곡 '살아가는 거야'를 불렀던 건 아니고 휴대폰으로 들려줬던..


찬란했던 기억입니다. 가끔 버스에서 그때를 생각하면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더라고요.

'재' 밑 실밥을 살짝 지웠습니다.


그리고 번외 편은 제가 평소 듣는 노래들을 위주로 리뷰를 했던 적이 많았고, 제가 말뚝가 노래​ (9분부터(출처: 팔각모의추억_Marine933) 하나로 해병대에 입대했으니, 그것으로 또 연결지어 이야기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병대를 상징하는 빨간 명찰, 그 중 일부분인 '재준'을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명과 암이 존재하기는 집단이기는 하나, 단순히 자랑이나 과시가 아닌, 오히려 그 안에서 겪었던 일들과 감정들, 슬픔, 찌질함, 무력함, 충돌, 용기, 배움 같은 것들, 그것을 바탕으로 전역을 하고도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들과 깨달았던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읽어주시고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들의 건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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