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소는 몸을 굽혀 금고 열쇠를 돌리고 돈 다발을 꺼냈다. 돈을 싼 신문지 속으로 돈 다발의 가장자리가 보일 뿐이었다. 메르소는 권총을 옆구리에 낀 채 한 손으로 돈 다발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채웠다. 백 장 묶음의 지폐 뭉치로 20개가 좀 덜 되었다. 메르소는 너무 큰 가방을 가지고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금고 속에 백 장 묶음 한뭉치를 남겨두었다. 가방을 잠그고 반쯤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불 속에 집어던지더니 오른손에 권총을 잡고 불구의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자그뢰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문 앞으로 지나가면서 내는 음식물을 씹는 듯한 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자그뢰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온통 비정하기만 한 4월 아침의 아름다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구가 와 닿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지켜보던 메르소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사유해보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쉰 번째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죽음'입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철학자, 극작가이며, 특히 '부조리'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철학적·문학적 작업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삶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파트리스 메르소라는 평범한 월급쟁이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부유한 불구의 남성을 살해하고 그의 돈을 훔치기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메르소는 더 이상 돈 걱정 없이 평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카뮈는 말합니다.
'행복해지려면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돈을 얻으려면 노동이 필요하고, 노동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평생 노동에 시간을 바치는 운명에 처해 있다.'
하지만 메르소에겐 그 행복 조건 1순위가 충족이 된 것입니다. 돈이라는 문제가 해결된 메르소는 이제 여행을 다니며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죽어나갈지 고민하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 '행복한 죽음'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파트리스 메르소가 여사친 세 명(로즈, 클레르, 카트린)이 살고 있는 집으로 놀러가는 내용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욕망과 고독의 경계에서 이상한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이윽고 모두가 밖으로 나가 일광욕을 하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인간은 인간의 힘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세계는 그 힘을 고스란히 남겨둔다. 로즈, 클레르, 카트린 그리고 파트리스는 그들 집의 창가에서 이미지와 겉모습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 사이를 이어주는 이런 유희에 동의했고, 우정에 대해서나 애정에 대해서 웃어넘겼다. 그러나 하늘과 바다의 무도 앞으로 되돌아오면 자신들의 운명의 은밀한 색깔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들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과 마주쳤다. 때때로 고양이들이 주인들 틈에 끼었다.
(생략) 그리하여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언덕 주위와 바다 위에서, 섬세한 햇빛 아래서, 하루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웃고 농담을 하고 계획을 세운다. 모두들 사물의 겉모습을 향해 미소짓고 그것에 순종하는 척한다. 파트리스는 세계의 얼굴에서 젊은 여자들의 심각하고도 미소짓는 얼굴들로 옮겨갔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주위에 갑자기 나타난 세계를 보고 놀라워했다. 신뢰와 우정, 태양과 하얀 집, 느껴질까 말까 한 묘한 뉘앙스, 거기서 때묻지 않은 행복이 태어났다. 그는 그 행복의 울림을 정확히 헤아릴 수 있었다. '세계 앞의 집'은 즐기는 집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집이라고 그들끼리 말하곤 했다. 파트리스가 그 점을 잘 느낄 수 있는 때는 모두들 저녁빛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그 무엇과도 닮고 싶지 않은 인간적이고도 위험스런 유혹을 마지막 미풍과 함께 자신의 속에 스며들게 하고 있을 때였다.
(생략)
화가 치민 '자연의 힘'은 밖으로 나가 햇볕에 눕는다. 그러나 모두들 곧 그녀 옆으로 모인다. 무심히 카트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클레르는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카트린의 장래를 결정짓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을 배정해주고, 부족분의 범위와 종류를 정해주는 것이 '세계 앞의 집'에서의 일상적인 관습이었다. 그녀가 이따금 자기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는 등등의 사실을 강조해 보이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불쌍한 것, 저 애에겐 남자가 필요해." 로즈의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모두들 햇빛 속으로 빠져든다.
(생략)
"당신도 따지고 보면 나와 같아."
"아녜요. 나는 행복해지려고 애쓸 뿐이에요. 최대한의 행복을..."
"그런데, 사랑만이 그 유일한 방법은 아니거든." 하고 파트리스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나는 그게 변변치 못한 이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건전한 이상이라는 건 알아. 그건 말이지..."
파트리스는 더 계속 하지 않는다. 로즈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귈라가 그녀의 무릎에 올라앉자 그녀는 고양이 머리뼈를 쓰다듬으며 반쯤 눈을 감은 고양이와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여자가 동일한 시선으로 비슷한 세계를 바라보고 되는 은밀한 혼례를 예고해 보인다. 예인선의 긴 고동 소리 사이사이에 모두들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긴다. 로즈는 그녀 몸의 오목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귈라의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내면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 뜨거운 열기가 두 눈께를 눌러대는 가운데 그녀는 맥박 뛰는 소리만 가득한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고양이들은 한나절 내내 잠을 자고 초저녁별이 돋을 때부터 날이 샐 때까지 사랑을 한다. 그들의 관능적 쾌락은 물어뜯는 듯하고 그들의 잠은 고요하다. 그들은 또한 육체가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영혼의 몫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영혼을.
"그래, 행복해야 해, 최대한으로." 눈을 뜨면서 로즈가 말한다.
세계는 언제나 단 한 가지 말만 한다. 별에서 별로 이어가는 저 참을성 있는 진리 속에서 하나의 자유가 이룩되고 그 자유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가는 또 다른 참을성 있는 진리 안에서처럼 우리를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리하여 파트리스, 카트린, 로즈, 클레르는 세상을 믿고서 자기를 내맡기는 데서 오는 행복을 의식한다. 이 밤이 그들 운명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 운명이 관능적이고 은밀하다는 것과 얼굴에는 눈물과 태양이 얼룩져 있다는 것을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래서 고통과 환희가 담긴 그들 가슴은 행복한 죽음으로 이끄는 이중적인 교훈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젠 밤이 깊었다. 벌써 자정이다. 세계의 휴식이며 명상과도 같은 이 밤의 앞에서는 나직한 팽창과 별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머지않아 다가올 깨어남의 시간을 예고한다. 별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하늘로부터 떨리는 빛이 내려온다. 파트리스는 친구들을 바라본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벽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카트린, 고양이 귈라에게 손을 얹고 등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로즈, 벽에 몸을 붙이고 꼿꼿이 선 채 튀어나온 이마가 하얀 반점 같아 보이는 클레르. 젊음을 서로 나누고, 자신들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행복의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 메르손느 카트린에게 다가서서 살과 태양으로 만들어진, 하늘처럼 둥근 그녀의 어깨를 내려다본다. 로즈도 벽으로 다가왔고, 넷은 모두 '세계' 앞에 마주서 있다. 이는 마치 보다 신선해진 밤이슬이 문득 그들의 이마 위에 떨어져 고독의 표시들을 씻어내면서 그들을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파르르 떨리는 덧없는 세례를 통해서 그들을 이 세계로 되돌려주기라도 하는 듯했다. 어둠 속에 별들이 넘칠 듯이 총총한 이 시간에 그들의 몸짓은 하늘의 커다랗고 침묵에 잠긴 얼굴 위에서 굳어진 듯이 정지한다. 파트리슨느 밤을 향해 팔을 쳐들어 내킨 힘으로 별 다발과, 팔의 움직임에 휘저어진 하늘의 물을, 그리고 보석과 조개껍질로 찬란하게 빛나는 어두운 색깔의 외투인 양 그들 주위를 에워싸며 발 아래 펼쳐져 있는 도시 알제를 확 끌어당긴다.
어떤가요?
벌써 쉰 번째 작품이 되었네요.
사실 이 작품은 제 첫 번째 게시글에서도 써먹은 내용이 있답니다.ㅎㅎ
그만큼 「희극의 파편」을 연재하면서, (연재란 말이 이젠 부끄럽기도 하네요) 이 매거진의 모토 자체가 이 작품을 염두해두고 있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와 첫 게시글의 작가 안톤 체홉의 그 사이의 무언가, 그러니까 진지함을 추구하면서도 그 냉정함에는 결코 우스꽝스러운 이 세상의 결함이 도사리고 있는 그 무언가..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그렇지만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저 멀리서 보여오는 빨랫줄과 같은, 얇은 사이사이에 그 연장선상에서 여러 작가와 작품들을 연결해보고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절반만 성공한 것 같기도 합니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면서 지독한 권태에서 어느정도 빠져나간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보는 것도 어려운 것 같아요. 반반? 절반의 경계도 사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부분에서 다른 무언가가 다시 새롭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새로운 글을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결론은 50번째 작품 끝으로 1페이즈가 마무리된다고 해야 할까요? 「희극의 파편」을 잠시 쉬어가려고 합니다. 가끔 제 게시글을 쭉 둘러보면 숨이 턱턱 막힙니다. 이걸 과연 봐주나? 저조차도 제 글인데도 가독성 없는 이 글을 읽기가 벅찰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게시글을 볼 때면 내가 이런 것도 썼었나? 하는 생각에 이질감도 들고 그럽니다.
글을 쓰는 일이 본성에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선 한없이 멀어지는 느낌도 듭니다. 가끔은 돌이킬 수 없는 느낌이 들어서 꽤 혼란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이 마음가짐이 나를 새롭게 살게 만들었는데 정말 가끔씩은 그 믿음이 화아악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예전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를 봤을 때 이정도밖에 안되나, 내가? 그런 생각도 드는데 또 다른 한편으론 이게 최선이었을 수도 있나? 라는 생각도 들고, 조금만 더 잘할 순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위태로운 사람의 글을 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구독해주시고 라이킷 눌러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오늘의 음악입니다.
찬송가
배우들은 기다리고 있고, 그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만드는 나는 음악의 힘을 겨우 빌립니다 그럴싸하면 그게 되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