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인식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그 사람의 아픔을 네가 알아? 얼마다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그래야만 했겠어.
그저 걱정과 안타까움에 자기 생각을 토로한 지인을 속으로 비난하고 꾸짖었다. 그럴 자격이 있냐면서.
생각해보니, 나도 그 생각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뭔데? 남이 나를 재단하는 것을 역겨워하면서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내 모습이 모순적이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마다 인식하는 형태와 방식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을 모두. 지난 글에서 스쳐가듯 말한 것처럼 나도 아치형의 다리 아래를 지날 때나 멀리서 반짝이는 굴곡을 보면 그 난간에 매달리고 싶었다. 더 이상의 방법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바로 눈 앞에 죽음이 넘실대며 손짓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무심한 어투로 느껴지던 그 글을 보며, 나는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내 선택을 단순 감정적인 결정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팠다. 물론 자살은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비슷한 선택을 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 그 과정이 얼마나 뼈 아픈지 알기에. 아주 간단하게 결론짓는 사람들에게 애석한 감정까지 느껴진다.
원망의 화살을 어느 누구에게도 돌리고 싶지 않은 지금 당장은, 나를 탓하던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상태이다.
여러 잔인한 사건들에 대한 자극적인 뉴스와 기사들을 보면서 아직도 이런 세상의 이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고 동시에 몇 년 지나지 않은 나에 관한 폭력들에 다시 화가 치밀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았고 의식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지금도 그 책망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미칠 것 같은 나날들이 이어져왔다. 생존자는, 특히 원망하고 욕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져 버렸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고통을 표출할 마땅한 길이 없어서 내면에 쌓아두거나 복수의 날을 자신에게 들이댄다. 딱 내가 그래 왔다.
그때 왜 저항하지 않았으며 왜 그 자리에 있었고 피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냐는, 결국 존재에 대한 의문까지 이어지는 질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특정한 사건 자체에 영향을 받는 것도 있지만 그로 인해 할 수 없었던, 놓치게 된 많은 기회들, 주변의 시선과 어떻게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내 박약한 의지로 돌렸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언제, 어떻게? 내 죽음에 의문을 가질 가족들에게 이것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무덤까지 가져가는 게 마지막 자존심처럼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감당을 확실한 이유도 모른채 슬퍼할 가족들에게 떠맡기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지만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큰 그림을 구상하고 난 나는,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상담 일정을 잡았고, 다행인지 자꾸 나를 절벽 끝에서 붙잡는 한 사람 때문에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