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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모 Nov 28. 2024

11. 상담받기 전

발행하지 않고 써 놓았던 것들이 있어서 이제야 올려본다

19년도의 나는 많이 아팠나보다.

대학에 들어가고, 코로나가 시작되기 이전.

갈피없이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1

2019. 8.

또다시 바뀐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첫 발은 뗐어도 밤은 여전히 슬프다.

3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는 아직도 처참한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담받아볼 걸 그랬나.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끝낼 수가 없다.

나를 보면 빠지지 않는 말.


'나는 네가 새벽 3시에 전화해도 받아줬잖아.'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노력했다. 나도 안다.

내가 죽으려고 전화할까 봐 벨소리를 귀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바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함께 한숨으로 일관해줬으니까.


사람은 이기적이다.

오랜 기간을 잘해줬어도, 한 번의 어긋남은 그 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낸다.

우리가 그랬다.


#2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재수가 없었던 건가, 정말 다른 사람을 선택했어야 했나.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아질 때쯤 다시 저 건너편으로 끌어내리는 개 같은 운명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뭘 그리 많은 잘못을 했었는지, 쉴 틈도 없이 겁을 준다.


#3


폭력은 꼭 나빠야만 하는가?

그 종류나 성격에 따라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지금까지 봐 온, 당해온 여러 형태의 폭력들.

이를 막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강제성이 주가 된 폭력은 엄연히 가해자의 잘못일까?

사회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에 있어 아직도 논란이 쉬질 않는다.

가해자를 그렇게 만든 환경을, 그의 부모를 탓해야 하는지 혹은 그저 개인의 변화와 굳어진 신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듯 보인다.


피해자들, 생존자들은 원망해야 할 대상이 불분명해지면 또 다시 고통으로 끌려들어 간다.

가해자라 믿어 온 사람을 저주하자면 그를 감싸려는 환경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이미 가시에 관통된 사람을 꿰내려는 낚시 바늘이 공중에서 대롱거리는 느낌이다.


엄연히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죽을 만큼 휘둘려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결코 빨리 찾아올 것 같지 않은 현실이다.


#4


무얼, 누굴 위해 살아가는 날들인지 갈피를 못 잡겠다.

우린 계속 이유를 찾는다.

나 자신에게서, 또는 주위의 누군가에게서.

숨을 더 이상 들이마시고 싶지 않을 때 찾았던 그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게 그때의 나는 최선이었다.


그가 한 말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나를 두 번, 세 번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며 증오했다.


#5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 어떤 충고도 위로도 아니야.

그냥 옆에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거.

그저 따스한 온도로 안아주는 거.

그거면, 그거면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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