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는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이라는 기발한 상상에서 시작한 SF 장르의 장편 소설이다. 출산율이 급감함에 따라, 정부가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국가 육아 시설을 설립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된 배경 설정이다. 국가 육아 시설인 nc센터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 면접 ‘페인트’를 진행하게 되고, 결과에 따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지 아니면 센터에 남을지를 선택할 수 있다.
가족 서사를 다룰 때, 많은 경우가족을 태생부터 주어진 필연적 존재, 혹은 어쩔 수 없이 화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페인트』는 이 가족 서사의 관습을 뒤집음으로써 가족을 필연에서 선택의 부분으로 옮겨 왔다. 표지에서도 드러나듯이, 소설은 가족의 출발점을 부모가 아닌 아이로 설정함으로써 아이의 시선에서 부모와 맺는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하나와 제노, 박과 제노의 관계는 가족의 가치를 찾아가는 하나의 여로인 셈이다. 부모 꿈의 대리인으로 살아왔던 하나는 제노에게 이상적인 가족 관계에 대한 비판점을 던져준다. 실제로 저자는 아동 학대를 다룬 기사를 접한 후 ‘부모 자격’을 논하는 댓글로부터 시작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엄마에게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듯이……” …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는 걸 말이야.”
- 본문
『페인트』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가 겪는 가족 구조의 급격한 해체 맥락과 부합한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가족이 해냈던 역할은 현재 많은 부분 사회와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 기본적인 교과부터 인간관계, 복지에 이르는 양육의 전 과정을 기관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nc센터의 아이들과, 현실의 양육은 이런 면에서 일정 부분 닮아있다. 『페인트』는 국가의 아이 중 한 명인 제노의 시각을 통해 가족의 중요성이 축소된 사회에서 가족의 필요에 대해 성찰한다. 이 주제에 관해선 다음의 출판사 보도자료를 참고하면 좋다.
”가족 중심 사회이자 부모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가 여전히 중시되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누와 여러 인물들이 던지는 물음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재산이 많으면 좋은 부모일까? 인품이 훌륭하면 좋은 부모일까? 부모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까?…”
- 창비 『페인트』 보도자료
가족은 스펙을 보는 면접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부모 면접의 최종 장에서 앞으로의 부모 면접을 중단하겠다 말한 제노의 선택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부모의 자격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소설은 그것을 소멸시키며 끝을 맺는다. 『페인트』는 이처럼 아이들과 기성세대의 관계를, 더 나아가 사회 속에 가족의 존재를 역전된 시선으로 재구성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알아 간다는 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 본문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읽으려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학부모님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부모일지 긴장하며 봤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육아는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부모도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이고, 아이들도 세상에 태어난 게 처음이니 모두가 서툴 수밖에 없죠.
- yes24 이희영 작가 인터뷰 中
편집 디테일들
1. 만듦새
『페인트』 표지
앞표지엔 배치와 구도에 중점을 둔 간결한 일러스트. 아이가 부모를 내려다보고 있는 구도가 관계의 역전을 암시하고 있다. 또 SF 장르임을 표방하듯이 보라색 중심의 색감과 노이즈 질감을 미스터리 한 분위기를 준다.
뒤표지에는 소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 면접’을 강조한 텍스트가 자리하고 있다.
2. 저자 인터뷰
yes24가 제1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페인트』에 대해 진행한 인터뷰는 작품의 탄생 배경과 숨겨진 의미를 세세하게 담고 있다. 또 한 가정의 엄마로서 이희영 작가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10대의 자녀를 둔 독자에게 공감이 갈 만한 내용이 많다.
Q. 청소년 강연과 학부모 강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를 텐데요. 각각 빼놓지 않고 전하는 말이 있나요?
A. 저는 학부모 강연에 가서는 아이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청소년 강연에 가서는 부모님들께서 주로 하시는 말씀을 들려줘요. 보통 학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굉장히 작은 점수를 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막상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돈 많은 부모 필요 없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엄마 아빠를 택하겠다”는 아이들이 정말 많아요. 그걸 학부모 강연에서 얘기해 드리면 위안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는 반대로 부모님들의 마음을 전하죠. 학부모님들은 늘 아이들에게 잘 못해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고, 본인은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그 얘기를 하면 아이들이 놀라는 것 같아요. “우리 엄마아빠는 그 정도로 부족하지 않은데”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반대로 이야기를 전하면 강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요.(웃음) 여자 친구들은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항상 엄마에게만 짜증을 부렸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요.
무엇보다 『페인트』에서 눈길이 가는 점은 소재의 독특함이다. 예상컨대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의 선정 이유도 일상적인 문제를 신선한 관점으로 풀어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페인트』는 『위저드 베이커리』와 『싱커』 이후 창비청소년문학상에 선정된 세 번째 SF 소설이기도 하다.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부모를 선택하는 시대, 내 손으로 색칠하는 미래
- 출판사 보도자료 中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이야기이다. ‘청소년이 직접 자기 부모를 선택한다’는 문제적인 가정(假定)이 이 작품의 핵심이자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매력 요소이다. 부모를 직접 면접하고 점수를 매겨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은 독자들에게 현실을 전복시키는 쾌감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