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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회지에서 밤 산책에 나서면

밤이 되면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by 성지

“밤이 되면 사물들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드러내주는 또 다른 차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자연의 빛이 낮 동안에는 우리에게 기껏 어둠을 찾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을 주는 반면, 밤이 되면 그 빛이 오히려 우리가 더 잘 보려고 하는 것을 환하게 비추어 주기 때문일까? 태양 아래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선택하는 데 그치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 수면 189p (장 그르니에, 민음사)


도회지에 밤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사방으로 튀기는 불빛이 소란하다. 사람으로 붐비는 이곳의 밤거리를 지나는 일은 내가 나고 자란 농촌에서의 산책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내 고향에선 야간까지 전광판을 밝혀 두는 상점들과 도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행렬을 보기 힘든 대신, 천구를 덮는 은하수가 괴괴한 시골 밤 풍경을 달래 주었다. 나는 혼자, 아니면 친구 두세 명과 함께 가로등조차 없는 밤거리를 호젓하게 거닐곤 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내 유년의 소중한 추억으로 선듯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별들이 제 모습을 감춘 서울의 밤하늘에선 이질감이 느껴진다. 건물과 도로에서 홍수같이 뿜어져 나오는 빛은 별을 삼키는 거대한 생명체 같다. 새의 시점에서 본다면 내가 서 있는 곳이 오히려 밤하늘의 중심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서울 도회지의 밤 산책은 재미있다. 나는 병원과 술집이 늘비한 거리와 차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거리 옆 작은 오피스텔에서 산다. 그래서 내게는 도회지의 밤이 시골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관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산책을 나설 때면 캄캄한 가게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곤 한다. 문 안 쪽에 들여진 광고 패널, 테이블 위로 뒤집혀 올려져 있는 의자들, 가게 안을 은밀하게 가리는 커튼, 나는 비밀처럼 숨은 가게의 얼굴 앞에서 삶의 흔적들을 추려본다. 카운터에 서 있는 직원과 지금은 테이블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에 골똘해 있을 사람들… 불 켜진 이곳은 하루 동안 이들에게 어떤 공간이 되어 주었을까? 어쩌면 고풍스럽게 노란빛을 내는 샹들리에가 사람들이 카페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의 가냘픈 마음을 따뜻하게 비춰 주었을지도 모른다. 버터 향이 나는 디저트가 점심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바쁜 이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을지도.


이처럼 일상이 저문 밤에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도회지의 특징이다. 나는 이것으로 나 자신이 인간으로 있음을 오롯이 느낀다. 시골에선 나와 자연을 구별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돌멩이와 실개천, 풀과 꽃, 개구리와 메뚜기,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같은 것이며, 밤이 되면 달빛이 비치는 곳을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됨을 본다. 인간은 인간으로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정신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곳에서 대자연의 리듬 소리에 발맞춰 걷는 대신, 어느 등불 밑으로 지나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게는 그야말로 자유가 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밤에 압도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대신, 이 괴물 같은 불빛이 나를 집어삼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근본적으로 공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의 낮과 밤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고, 서로가 되기 위해 흘러간다. 낮은 밤에게, 밤은 낮에게 희생된다. 수면 또한 마찬가지다. 수면은 수면 그 자체로 있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위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삶은 완전히 도구적인 것이 돼 버린다. 이 도구를 쥔 이는 누구인가? 내가 자연의 일부이던 시절에는, 내가 시골에 살던 때에는 이런 질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간적인 가치가 가득한 대도시에서는 허무가 내 등 뒤를 노리고 있는 것을 자주 느낀다. 불빛으로 가득한 이 시가지는 도시인의 이리저리 헤맴이다.


어떻게 하면 정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적어도 경제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밤은 오직 밤으로 있어야 한다. 장 그르니에는 "태양 아래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선택하는 데 그치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밤이 주는 자유로움을 강조했다. 이때 자유란 비단 노동 시간에서 해방된 해방감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밤이 주는 자유의 종류는 정신적인 것이다. 우리는 밤이 되면 경제생활이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할 시간을 얻는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모든것[만유]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그것보다 더 고귀하다"라고 했다. 우리는 유한성과 무한성(죽음 너머의 무언가로 대표되는 영속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지닌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이것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항상 유한성보다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 자체는 우리의 정신이 유한성에서 벗어날 토대를 만들어 준다.


나는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삶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 지점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창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시의 밤은 이 유한성을 잊게 해 줄 유흥의 거리를 지니고 있다. 도시인은 지나치게 일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밤이 보여주는 삶의 이미지에 종속되고 만다. 우리는 도회지에서 하는 밤 산책이, 우리가 사물의 이면과 여러 삶의 등성이를 마음껏 누빌 수 있게 하는 선택권을 준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유한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상상력은 노동 시간도 아니면서, 많은 사람을 마주칠 수 있는 밤 산책길에서 분화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위한다'는 자발성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종종 도회지 산책에 나선다. 다만 이번 산책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걷는 일이다. 나는 세간의 불빛 속에서 내 자리를 선택하는 일에 지칠 대로 지쳤다. 스스로 정신의 허기를 알아차리고 나면, 시가지에 나서도 번쩍번쩍한 전광판의 힘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대신 가끔은 내가 살던 곳의 은하수가 그립다. 내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주었던 별들은 아직 그 자리에서 추억을 간직한 채 빛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니 내 마음속에 스스로 은하수를 새기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나의 고향과 별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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