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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 Dec 25. 2024

판타지 주인공의 가능성

『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밝은세상

제목: 재뉴어리의 푸른 문 (The Ten Thousand Doors of January)

저자: 앨릭스 E. 해로우

표지: Jen Yoon

역자: 노진선

출판사: 밝은세상 

발행일: 2024-06-25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이번 해 유월에 국내에 출간된 판타지 소설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의 최종 후보작이자 아마존 에디터가 뽑은 최고의 판타지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독자들의 관심이 해외 문학상을 받은 기존의 문학 작품에까지 뻗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재뉴어리의 푸른 문』 또한 장르 문학으로서 독자들의 갈증을 색다르게 채워 줄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2024 러시아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한 ‘작은 땅의 야수들’과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철도원 삼대’는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 이후 각각 36배, 95배 판매가 치솟았다.’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라이트 노벨 등에서 하위 장르로 입지를 굳힌 ‘이세계물’처럼 퓨전 판타지의 문법을 따라가고 있지만 동시에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정통 판타지의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판은 표지에서부터 고전적인 서체와 디자인을 사용하여 그 분위기를 공고히 쌓아 올린다. 『재뉴어리의 푸른 문』 역시 판타지 소설로서 드라큘라나 표범으로 변하는 인간 같이 정형화된 캐릭터와 설정을 일부 차용하지만, 최근 가볍게 소비되는 판타지류의 작품들과 다르게 근대의 역사적 배경과 이야기, 인물을 탄탄하게 엮어내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담아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고전풍 퓨전 판타지, 문지방을 넘으려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20세기 초, 소녀 재뉴어리는 사고로 엄마를 잃고 자신과 아빠를 거두어준 W. C. 로크 회사의 최고 경영자 윌리엄 코닐리어스 로크씨의 저택에 더부살이로 얹혀 있다. 아빠는 딸과 함께 살 거처를 로크씨에게 제공받는 대신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온갖 희귀한 보물을 모아 로크씨의 저택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그 때문에 재뉴어리는 아빠와 늘 떨어져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재뉴어리가 그냥 재뉴어리로 있도록 놔두지 않는다. 재뉴어리는 로크씨와 동행하다가도 자신의 붉은 피부 때문에 어딜 가나 정체성을 의심받고 저울질당해야 하는 신세다. 모험심 넘치는 성격의 재뉴어리를 못마땅해하는 윌다양은 로크씨의 지시에 따라 재뉴어리를 ‘착한 소녀’로 만드려고 애쓴다. 재뉴어리는 항상 단정한 옷가지와 말씨를 갖추어야 하고, 로크씨가 매년 로크하우스에서 주최하는 협회 파티의 손님들 앞에서는 마땅히 마음씨 좋은 로크씨의 보물 역할을 해야 한다. 재뉴어리는 로크하우스에서 자신의 모험심 넘치는 성격을, 아빠가 그리운 마음을 꾹 참고 그저 착한 소녀로 살아야 하는 것이 괴롭다.


|나는 호텔 로비와 백화점, 단추가 가지런히 달린 여행용 코트에서 벗어나 생기로 진동하는 세상의 흐름 속으로 물고기처럼 뛰어들어 아빠 곁으로 헤엄쳐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48쪽


그러던 어느날 재뉴어리는 로크씨를 따라 우연히 오게 된 켄터키주의 미시시피 강 옆에서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발견하게 된다. 푸른 문은 순식간에 재뉴어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가 문 너머에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지방을 넘으려고 발을 들인 순간, 재뉴어리는 삼나무와 햇살 냄새가 나는 미시시피 강에서 은빛 바다로 둘러싸인 높은 절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까마득히 먼 아래에는 웅크린 손바닥에 놓인 자갈처럼 만곡을 이루는 섬의 해안가에 감싸인 도시가 있었다.’ (22쪽)


이 책에는 현상 유지를 위해 판타지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려는 지배 세력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주인공 일행이 이 세력에 맞서 기존 질서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문’을 계속해서 헤집어 다니며 진행되는데, 이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상상력, 판타지 그 자체가 곧 삶이라는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 보인다.


판타지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장르라면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그 기대를 완벽히 충족하는 판타지 소설이자,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틈새이자 샛길이고, 미스터리이자 경계이며, 문 그 자체이다. 재뉴어리는 문을 통해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끝없이 모험하게 된다. 이때 재뉴어리가 문을 열고 저쪽 세계로 건너갈 때 사용하는 열쇠는 바로 글이다. 재뉴어리는 작 중에서 글을 써서 세계의 질서를 조정하는 능력을 지녔다. 재뉴어리는 글을 써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문을 만들기도 하고, 현실을 뒤바꾸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글 혹은 문으로 겹겹이 싸여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재뉴어리가 모험을 떠나게 되는 계기인 ‘일만 개의 문’은 제목에 쓰인 대로 문이자, 율 이언이 남긴 책이다. 『재뉴어리의 푸른 문』 또한 제목에 쓰인 대로 문이자, 재뉴어리가 새뮤얼에게 남기는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재뉴어리는 그야말로 두 개의 세계, 현실과 ‘일만 개의 문’ 속 세계 사이를 잇는 중간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로써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현실 세계와 독자를 재뉴어리의 판타지 세계관으로 편입시킨다. 독자는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재뉴어리와 함께 문지방을 넘나드는 여정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판타지 주인공의 가능성


문은 그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미스터리하다. 작 중에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문은 열렸을 때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세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차원의 물건이나 사람이 기존 세계의 질서에 예측불가능한 변화를 불러오리라는 것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변화가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올지, 파멸을 초래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니 문을 열고자 하는 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세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법의 문을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변화를 아예 없애는 편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소설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대답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의 이야기가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초, 시대는 자기 모순에 부딪혔다. 노예 해방이 선언되었으나, 유색인종과 여성은 여전히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으며, 계몽과 혁명으로 과학기술과 정치 형태가 더없이 진보했으나, 열강은 문명화를 빌미로 약소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일삼았다. 계몽과 평등의 정신으로 시작된 근대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차례의 세계 전쟁으로 끝이 났다. 당시 시대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유색인종이자 여자인 재뉴어리가 모종의 변혁을 꾀하는 것은 금기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나폴레옹 같은 남성만이 그런 일에 능통하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이렇듯 근대를 엄습해 오던 어둠을 이야기에 잘 녹여내었다. 이야기에서는 문을 닫으려고 하는 세력과 재뉴어리 일행이 충돌한다. 재뉴어리가 근대성의 반대 지점에 위치한 ‘붉은 피부의’ ‘여성’ 인물로서 백인 남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문을 마구 헤집고 다니며 스스로 변화를 주도한다는 서사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저항적이다.


|이 세상에는 벌써 문이 사라진 효과가 나타나는 듯했다. 여름 내내 문을 닫아둔 집처럼 미묘한 침체와 부패가 나타났다. 절대 해가 지지 않는 제국들과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 절대 마르지 않는 부의 흐름, 절대 지치지 않는 기계들이 등장했다. 시스템은 신이나 엔진처럼 너무 방대하고 게걸스러워 와해될 수 없었고, 남녀를 통째로 삼키며 하늘로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346쪽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은 한 세기를 건너 여전히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변화의 문을 계속해서 닫으려는 권력과 문을 계속해서 열고 다니려는 저항의 목소리가 아직 혼재하기 때문이며, 현대 문명을 이루는 시스템들이 그 말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열된 자본주의는 1900년 초의 근대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 열차가 충돌하기 전에 문을 발견해야 하는 급박한 처지에 놓였다. 만약 문을 간단하게 여는 것만으로 모든 상황이 희망적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분명 녹록지 않지만, 재뉴어리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로 글을 써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이야기야말로 변화의 가능성 없이는 절대 탄생할 수 없으며, 질서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로 쓰인 글은 얼마나 자주 세상을 바꿨던가?


|문은 위험하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문은 혁명이고 격변이고 불확실성이고 미스터리이고 중심축으로 온 세상이 그 축에 따라 뒤집힐 수 있다. 문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고, 세상 사이의 통로로 모험과 광기, 심지어 사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문이 없다면 세상은 침체되고 석회화되며 모든 이야기가 사라진다.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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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재뉴어리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그래서 종종 독자에게 말을 걸거나 독백하는 부분이 보이는데, 이러한 서술 방식이 판타지 세상에 몰입하는 데 꽤 도움을 준다. 역사학 전공자답게 역사적 묘사가 세밀하다. 그리고 비유가 엄청 특이하고 많다. 설명이 너무 길어서 가끔은 휙휙 넘어가게 되는 게 단점 아닌 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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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다르게 Jen Yoon이 작업한 고전풍의 일러스트를 표지 디자인으로 내세웠다. 앞표지에 재뉴어리의 뒷모습, 배드, 에이드로 추정되는 인물의 뒷모습과 은화, 나침반 등의 모습이 담겼다. 서체와 일러스트가 조화를 이루어 고유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재뉴어리가 열고 들어가는 D 모양의 문에는 홀로그램 부분 코팅 처리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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