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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 Nov 22. 2024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 에세이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양질의 콘텐츠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그 표지와 제목에서는 예상할 수 없지만 엄연한 ‘영화 평론집’이다. 영화 평론집이라고 하니 어딘가 멀게만 느껴지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 평론집은 수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으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스트/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나는 으레 콘텐츠 전공자가 그러는 것처럼 어째서 영화 매니아들한테나 팔릴 영화 평론집이 이토록 오래 사랑받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콘텐츠의 질 따위 의미 없어진 지 오래다.”라고 말해도 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맞다. 누구보다 창의적인 콘텐츠와 책을 사랑하지만, 인정하겠다. 이제 콘텐츠의 질은 단순히 콘텐츠의 내용이 정하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에서 중요한 건 어떤 플랫폼에 유통되냐 이니까. (물론 책은 실물로 판매되기 때문에 아직 콘텐츠 자체의 질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이상하게도 이 어리석은 질문을 계속 곱씹게 되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충격받았다. 이런 책이 스테디셀러가 되는 거구나, 하고. 


최근에는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이 같은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무척 흡사한 기획으로 출간되었다. 두 책 모두 주간지에서 연재하던 글을 새로 엮은 것이라는 점에서 같고, 또 예술 작품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같다. 또 두 책은 비전문가가 접하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 주제-영화와 고전 문학-를 다루고 있음에도 읽기 어렵지 않다. (디자인도 어딘가… 비슷하다!) 심지어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도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발간되자마자 불티나듯 판매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형철 평론가가 그런 것처럼 두 작품의 공유 지대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생성하는 어떤 논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선 두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주간지 지면에서 이미 한번 연재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저자 혼자서 주간지에 글을 싣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원고는 교정•교열 및 윤문을 거쳐야 하고, 무엇보다 지면에 알맞은 모양으로 편집되어야 한다. 게다가 주간지에 글을 싣기 위해서는 애당초 플랫폼 소속의 담당자가 작가에게 연락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지면 담당자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일 수도 있고, 아예 하나의 팀일 수도 있다. 따라서 완성되어 지면에 업로드된 글은 적어도 두 명의 손을 거친 상태인 것이다. 또 글들을 다시 하나의 단행본으로 엮을 때는 어떠한가? 두 명 혹은 그 이상이 합을 맞추어 만들어낸 글은 다시 한번 책의 꼴에 맞게 재조립되어야 한다. 출판사의 출판 편집자는 이때 팀으로 합류한다. 출판 편집자는 다시 원고를 교정•교열 및 윤문하되, 이번에는 흩어져 있는 글들에 단행본에 걸맞은 콘셉트와 색깔까지 입힌다.

여기에 출판사의 마케터와 디자이너의 첨언까지 더하면 작품은 그야말로 조직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책머리에서 저자인 신형철 평론가는 많은 이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데 한 문단을 썼다. 


| 연재를 제안해준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님 덕분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가 쓰는 모든 글의 독보적인 섬세함을 나는 열렬히 흠모한다. 내게 주어진 지면을 담당했던 신두영 기자님에게도 감사드린다. 감사보다는 사과가 필요할 정도로, 한 달에 한 번 지독한 마감 전쟁을 함께 치러주셨다. 박찬욱 감독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있어 기쁘다. 연재 도중 감독님으로부터 날아온 전갈은 결정적인 격려가 되었고, 보내주신 추천사를 읽은 밤에는 두려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님의 호의와 담당 편집자 박지영 님의 노고 덕분에 결국 책이 나올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내 글을 귀하게 여기는 이를 만나 함께 책을 만드는 일의 행복은 글 쓰며 사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과분한 특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내 아내 신샛별은 이 책이 다룬 거의 모든 영화를 함께 보았고 최상의 토론 상대자가 되어주었으니 사실상 공동 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나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 「책머리에」 


나는 이 조직적인 창의 활동 자체가 콘텐츠의 질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조직은 글쓴이와 독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면 담당자와 편집자, 마케터, 디자이너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작가의 예술 작품을 상품으로 탈바꿈시켜 독자에게 읽히게끔 하는 데 있다. 예술에 상업의 맥락을 더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비창의적 노동을 맡는 셈이다. 작가는 가끔 자신의 독창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해 상업성의 경계 바깥으로 튀어 나가기도 하는데, 비창의적 노동자로 이루어진 조직은 여기에 고유한 생산 관행과 틀을 제공함으로써 균형을 조절한다. 예를 들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글을 네 개의 큰 주제로 묶은 것이나,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에서 기존에 연재되었던 글의 순서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끔 재배치한 것 등이 조직이 제공하는 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형철 평론가와 진은영 시인은 처음부터 독자를 고려하면서 글을 썼을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본문에서 이렇게 썼다. 


| ‘특수’를 고집할 때 ‘보편’을 잃고, ‘보편’을 지향하면 ‘특수’를 잃는다는 것 말이다. (36쪽) 


양질의 콘텐츠는 결국 비창의성과 독창성 사이의 균형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독자를 상상하면서 글을 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작가가 초고를 쓰는 단계에서부터 작품에 비창의적인 요소가 더해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선 작가의 역량에 따라 균형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조직은 필요하다. 큰 성공을 거둔 두 책은 인터넷에 한 번 연재된 글을 다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따라서 조직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책은 거름망을 다른 책보다 한 번 더 통과했기 때문에 단행본 출시를 결정했을 때는 원고를 입수하는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의 완성도를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제목: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저자: 신형철

출판사: 마음산책

발행일: 2014-10-01 (10주년 기념 한정판 2024-08-15)


영화 속 인물이 되거나, 평론의 대상이 되거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영화 평론집이다. 그런데도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영화적인 것’을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저자인 신형철 문학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삶’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평론가는 영화 평론을 일종의 실험으로 간주한다. 영화는 실험대에 놓인다. 영화는 마치 삶처럼, ‘어떤 깨달음의 형태로 굳어지기 전에, 그저 흐르고 있는 그 상태 자체로, 무無의미가 아니라 미未의미의 형태로 보존(240쪽)’되기 때문에 삶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용이한 실험체가 된다. 그리고 평론가는 마치 실험실에서 다음에 어떤 물질을 더 첨가하고 잘라낼지 신중히 계산하듯 글을 전개한다. 말하자면 평론가에게 예술이란 삶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이다. 평론가는 예술가를 평가할 때 더 중요한 쪽은 ‘기술적인 요소들’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라고 말한다(28쪽). 저자는 다음의 서문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 영화의 서사를 음미하는 이 책이 ‘영화적인 것’을 탐구하는 영화학에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을 것이다. 비전문가의 한계이자 특권이겠지만, 내 관심사는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심지어 문학도 아니라) 삶이라는 서사다. 내가 위대한 영화 작가와 비평가들에게서 발견하는 미덕 역시 ‘영화적인 것’의 순수성에 대한 배타적 옹호가 아니라, 삶에는 예술이 밝혀내야 할 비밀이 많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헌신이다. - 한정판 책머리에


따라서 우리는 글을 읽을 때 영화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느슨하게라도 구분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서사 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둔 복선이나 연출, 구조 따위를 철저하게 파헤친 다음 영화사의 맥락을 대보고 영화와 비교 분석하는 것은 영화의 전통적인 규칙을 전제로 하므로 영화적이다. 그러나 평론가는 영화가 마술처럼 만들어내는 영화적 순간에서 영화사에 기여할만한 어떤 숭고함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평론가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의 바깥, 조금 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영역에 있다. 일례로 첫 번째 글인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에서, 평론가는 영화 <러스트 앤 본>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들여다보고 ‘사랑의 논리학’을 끄집어낸다. 여기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평론의 대상인 것이다. 각 영화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여자의 다리에 장애가 있다’는 점에서 같지만(20쪽), ‘자기들의 관계가 사랑이 맞는지’ 묻는 여자의 질문 앞에서 남자가 서로 다른 대답을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평론가는 두 연인의 선택이 끌어낸 서로 다른 결과에서 사랑 그 자체에 어떤 논리가 내재해 있는지를 추론해 낸다. 사랑은 서로의 ‘있음’으로 상호 충족시켜 주는 관계일 때 일시적이고, 서로의 ‘없음’을 바라볼 때 비로소 영속성을 부여받는다는 식이다. 평론은 더 나아가 글을 읽는 우리 또한 논리학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데서 귀결한다. 평론가는 영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삶의 눈높이에서 영화를 얘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글 속에서 영화 속 인물이 되거나 평론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평론가에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다면 평론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평론가는 사랑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난 뒤에 단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다음의 말은 평론가가 우리 삶의 평범한 가치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 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고유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26쪽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신형철 평론가가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연재한 글들에다가 다른 지면에 쓴 글 세 편을 함께 엮어’ 만들어졌다(10쪽). 연재된 글을 4가지 주제로 묶고 각 장마다 기존에 없던 소제목을 추가로 달아 구분하였다. 앞서 언급한 ‘사랑이 논리’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글도 ‘욕망의 병리’, ‘윤리와 사회’, ‘성장과 의미’와 같이 인문학에 가까운,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여기에다 평론가가 책머리에서 비평, 다시 말해 ‘실험’의 고유한 목적에 관해 쓴 부분을 더한다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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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기념 특별판 표지는 김마리(퍼머넌트 잉크) 디자이너가 함께했다. 약동하는 자연의 생명력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관점에서 탄생한 표지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새뜻하게 조응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포함하는 문장들과 어우러지는 표지 위 제목의 배치에는 “이 아름다운 책의 텍스트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디자이너의 세심한 의도가 담겨 있다. 양장으로 단단하게 감싸면서도 본문 종이를 보다 가볍게 하여 만듦새와 편의성을 모두 고려한 특별판이 이번에는 독자에게 정확한 기쁨으로 가닿을 것이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제목이 아닌 것처럼 가장한 제목. 청박 처리가 되어 있는 글자만 붙여 읽으면 제목이 된다.  




제목: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저자: 진은영

출판사: 마음산책

발행일: 2024-09-15 


1. <한국일보> 지면에 연재했던 글을 엮은 책.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 온 진은영 시인의 신간 산문집으로, 올해 9월 중순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출간되었다. 진은영 시인은 등단 이후 네 권의 시집을 발간했을 뿐 아니라 교수로서 세계의 예술 작품들에 주석을 다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2016년에 출판사 <예담>에서 출간한 『시시하다』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연재한 '아침을 여는 시' 가운데 92편을 골라 엮은 첫 단독 산문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시하다』는 2020년 절판되어 시중에는 중고 상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시인의 첫 산문집이 절판될 즈음인 2021년, 진은영 시인은 <한국일보> 지면에 ‘다시 본다,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시 본다, 고전’은 박연준, 진은영 시인, 배수아, 강창래 작가와 같은 문학인들의 눈으로 세계의 고전을 재조명하는 <한국일보>의 구획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진은영 시인의 글들은 출판사 <마음산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시인의 끊임없는 글쓰기 아래 탄생하였고, 그와 동시에 불티나듯 판매되었다.  



2. 책을 들어 얼어있던 삶을 내리쳐라 


책은 불운한 이에게 한없이 다정한 것이다. 작가는 80명의 순탄한 삶을 쓰기보다 20명의 독특하고 위태로운 삶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한편으로 책은 따갑고 시린 것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9쪽). 책은 때로 거친 너울처럼 예고도 없이 속을 뒤집고. 마침내 우리가 현기증으로 쓰러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면 작가는 우리가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할 것이다(9쪽).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진은영 시인의 독법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고전’에 연재했던 글을 재차 촘촘히 엮은 책이다. 진은영 시인은 고전을 쓴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끈질기게 절망적인 삶에 분투하는 모습을 보았다. 만약 연재 글에서 진은영 시인이 천착했던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흩어져 있던 글을 그대로 가져왔더라면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재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 위해서 출판사는 기존에 연재되었던 글의 순서를 알맞게 재조립하는 공을 들이기도 했다.)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쓴 글은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진은영 시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61쪽) 


그래서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에선 글을 대하는 진은영 시인의 태도가 특히 엿보인다. 책의 제목은 정직하게 책의 의도를 드러내 보인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은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이고 또한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진은영 시인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쪽). 진은영 시인은 ‘다시 본다, 고전’에서 다루었던 작가들을 열거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시인에게 이들은 삶이라는 고해苦海와 끊임없이 맞서 싸웠던 용사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는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10쪽). 


실제로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에서 다루어진 작가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 선고된 절망적인 판결에 저항했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다룬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의 결연한 태도를 보라. 모리스 블랑쇼는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구를 파는 자는 모든 우상을 거절해야 하고, 모든 것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진리도 체류할 미래도 갖지 말아야 한다. 희망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3. 나 최신 유행이다.


한편으로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트렌드에 올라탄 에세이다. 지난해 ‘자기계발서’와 ‘고전’은 출판 시장의 주축으로 솟았다. 자기계발서는 2023 교보문고 연간 종합 순위 10위 내 네 자리를 석권했다. 자기계발 에세이 <세이노의 가르침>, <원씽>, <역행자>가 1위부터 3위에, <김미경의 마흔 수업>이 7위에 올랐다. ‘고전의 재조명’ 현상은 작년과 올해 상반기에 걸쳐 이어졌다. yes24 상반기 종합 순위를 보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이 네 권이나 10위 안에 포진해 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1위에, 쇼펜하우어 원저작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가 각각 4, 6위에, 니체 원저작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가 9위에 자리했다. 고전 장르의 발돋움은 자기계발서가 인기를 끈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교보문고는 고전이 다시 주목받는 현상에 관해 2023 출판 동향 보고서에서 ‘자아성찰적이고 현실을 직시시키는 기조의 철학자’들이 재조명받는 것이라 말한다. 팍팍한 현실에 지친 독자들이 앞으로 돌파해 나갈 힘과 지혜를 고전의 쓴소리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그렇다면 자기계발과 고전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진은영 시인은 책머리에서 독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10쪽) 더하여 ‘책을 추천하는 책’이니 텍스트가 힙하다며 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 된 젊은이들의 문화에 적극 내밀만하지 않을까? 진은영 시인이 책을 읽는 방법은 그 무엇보다 자기가 말한 바와 같이 ‘평범’하므로 더 와닿는다. “내 빨간 수첩과 내 머릿속은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한 타인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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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광 코팅된 표지, 특이하게 벌집 모양 무늬가 작게 박혀 있어 표지의 사진이 모자이크된 듯한 느낌을 준다. 강렬한 라일락 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쉽게 볼 수 없는 색채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서점에서나 모두 금방 눈에 띌 것 같다. 내지에 두꺼운 모조지를 사용한 것 같다. 책이 빳빳하게 펼쳐진다. 마치 아트지로 된 잡지를 넘기는 듯한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고급스럽게 정성을 들인 듯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내게는 글 조각을 하나의 책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여전히 놀랍게만 느껴진다. 어떤 책은 무척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상 같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과 『정확한 사랑의 실험』도 그중 하나다. 마음산책에서 만든 에세이에선 넉넉한 느낌이 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이 아주 정교하게 기획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처음부터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집어 들었으나, 읽을수록 본문과 기획된 콘셉트가 절묘하게 조화되는 것에 푹 빠져들어 읽게 되었다. 책을 중간쯤까지 읽었을 때는 두꺼운 내지가 주는 빳빳한 느낌이 좋았다. 빳빳해서 잘 펴지지도 않는 내지가 사소한 것에도 무척 공을 들인 듯한 인상을 주었다. 


창조는 편집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편집 행위는 이미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재창조 행위라는 것. 책을 읽을 때마다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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