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내가 불행한 사람이기를 바랄 때가 있다.
나는 슬픔이 새는 망태기 같아
할아버지가 잡아가서
입술을 꿰 주기만 기다려
새장 속에 가두기만 기다려
온몸이 구멍인 그 집 속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구멍인지
모르게 되었으면 좋겠어
장맛날들만 지루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있다. 별일 없어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이 좍좍 내릴 때가 있다. 차라리 그렇게 썩어서 몸이고 기억이고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에 이 시를 썼다.
세 달이 넘도록 취업이 연계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서류와 필기 시험, 면접까지 총 세 단계를 거쳐야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몹시 바쁘게 지냈다. 매일 눈을 뜨면 점심을 챙겨 먹고 학교 도서관에 갔다. 서류를 고쳐 쓰고, 필기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하고 나면 금세 도서관이 문을 닫는 열한 시가 되었다. 나는 습관을 잘 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도서관과 집을 오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지만, 범위도 정해져 있지 않고 기출 문제도 없는 필기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여간 까탈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책 네 권을 통째로 달달 외웠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몰라 심한 불안감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에는 시험 당일 나는 예상에 없던 문제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아무리 공부해도 맞힐 수 없는 얼토당토않은 문제도 여럿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그날 모든 운을 다 쓴 것 같다. 이상한 필기 시험에 합격하고, 경쟁률이 1:2에 불과한 면접에서 떨어지다니.
면접을 보고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어렴풋이 나의 운명을 예감했다. 면접관들은 유난히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내 대답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또 빈약했다. 내가 면접관이었어도 나를 안 뽑았을 것이다. 그래도 차라리 필기에서, 차라리 서류에서 떨어졌다면 기분이 더 괜찮았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필기 시험을 보고 나서 결과를 기다리는 2주는 정말이지 악몽이었다. 면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없을지도 모르는 면접을 준비했다. 면접을 연습하다가 자주 욕지기가 나서 속이 상했다.
이럴 때면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처음부터 불행하거나 몹시 슬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슬픔이 슬픔 속에서 슬픔이 아니게 되기를 바란다. 한동안 혹시 찾아올지 모를 행복에 기껍다가 맛보는 좌절은 더욱이 쓰다. 나는 이것을 망태할아버지의 새장에 비유해서 썼다(망태할아버지는 엄마 말 안 듣고 거짓말하는 아이를 잡아다가 입을 꿰매고 새장 속에 가두는 상상 속의 존재다.). 이것은 조금은 자해적인 비유다. 나의 슬픔이 그치도록 차라리 그 근원인 나 자신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불행한 사람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달처럼 떠 있는 슬픔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겉모습은 조금 달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모양인 슬픔을 공유하고 있다. 늪 같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시에서 자그마한 안식을 얻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