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겐 시詩라는 짝꿍이 필요하다.
점심시간마다
책을 읽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남몰래 끙끙
앓는 일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역시
사랑에 폭삭 빠져 버린 걸까
비 오는 날이면
더 고불거리는
내 짝꿍 머리는
곱슬머리
인간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인가? 나는 언제나 냉소와 비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이미 우리에게 말해 주듯이,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첫머리의 질문으로 단지 인간관계에서 잡음을 일으키는 소통의 오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존재 간의 불가해성을 묻는 것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지구에서 달을 보듯이 겨우 상대의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고작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 모양일지 어렴풋이 떠올려 볼 뿐이다. 수많은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칸트는 일찍이 인간 정신의 형이상학적 시도를 "멀고도 폭풍우 치는 대양"의 항해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태양을 알지 못하고 땅도 알지 못한다. 그냥 태양을 바라보는 눈과 흙을 느끼는 손을 알 뿐이다"라고 말했으며, 사르트르는 소통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타인과 동화되기를 원한다. 내 욕구와 감정, 사유와 자아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이러한 쏠림 상태는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서로를 마주 보는 일은 사실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는 존재"라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자신의 진상에 다다르지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표상(그림) 뿐이다. 중세 철학자 파스칼은 진작에 이 한계점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맞아들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사람들이 방에 혼자 조용히 있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마음 한편에선 남과 기꺼이 손 잡기를 부추기지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그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리라고 넌지시 경고한다.
그 때문에 뭇사람은 문학에 종교처럼 의지하곤 한다. 문학은 놀이의 규칙이나 너와 나를 나누는 경계를 지우기 때문이다. 일본 문학가 다와다 요코(多和田葉子)는 "모든 일탈은 시의 기회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라고 했다. 문학은 애당초 자기 자신을 탈출하려는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잘 쓰인 문학은 이 의지를 잘 다듬어서 만인의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은 "세계에서 본래 본질적인 것, 그 현상들의 참된 내용, 그 어떤 변화에도 굴복하지 않고 따라서 모든 시대에 걸쳐 똑같은 참으로 인식되는 것"을 관찰한다. 이 정의가 반드시 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예술에서 이러한 특성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읽고 자기 자신과 세상의 불확실함에서 느끼는 고통에 조그마한 위안을 얻곤 한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내가 설명하려고 하는 마술 같은 경험은 이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시를 선물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 시를 읽고 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농담이 아니라 나는 정말 시 옆에 그려진 그림처럼 생겼다. 나는 심한 곱슬머리이다. 어렸을 땐 곱슬머리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풍성한 머리카락에, 남들보다 갑절은 마른 편이어서 별명이 '면봉'이었던 게 기억난다. 그때도 무척 예민하고 남 눈치 많이 보던 나는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았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머리를 곧게 펴는 시술인 매직을 시켜 달라고 울면서 조르기도 했다(부모님은 그때 얼마나 충격받으셨을까?). 곱슬머리로 산 지 몇십 년이 된 지금도 곱슬머리가 신경에 거슬릴 때가 있다. 손질하기 귀찮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그 덕분에 나는 솜사탕 같은 곱슬머리를 모자에 가득 쑤셔 넣고 다닐 때가 많다.
그런데 친구가 어느 날 이 시를 써서 나한테 주는 게 아니겠는가. 평생 콤플렉스로 생각해 왔던 내 곱슬머리를 귀엽게도 써 주었다. 내 예민한 성격과 생김새를 잘 관찰하지 않으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관심이 이 내심 고마웠다. '내 동생 / 곱슬머리 / 개구쟁이 내 동생'으로 시작하는 동요 <내 동생>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따뜻한 시선을 주제로 한 새로운 시를 썼다. 그 시가 바로 글의 첫머리에 쓴 <내 짝꿍은>이다. 짝꿍은 유년기에만 쓰는 애정 어린 단어다. 시어에서 소상함이 묻어났으면 해서 짝꿍이라는 단어를 썼다.
친구가 써 준 시를 읽고 모두에게 걸맞은 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는 최고의 짝꿍이다. 내게 시를 선물한 친구가 존경해 마다않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려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짝꿍의 존재를 밝힌다. "아이의 첫 움직임은 비록 자기중심적일망정 분명 타인을 향한 움직임이다. 생의 첫 순간부터 일종의 공존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