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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수 Feb 12. 2021

온전한 성장

초등학교 4학년 늦여름, 나는 학교 수업과 방과후 수업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이사 온 지 6개월 정도 된 내가 살던 아파트는 초등학교와 꽤 떨어져 있었다. 전단지 단골멘트인 ‘초 역세권’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탐났던 부모님은 고작 초등학생인 나와 시간 절약이 필요한 고등학생 오빠의 학교부터 집까지의 거리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나 보다. 부산으로 이사 온 목적 중 하나가 아이들의 교육이었지만 말이다. 집에서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까지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를 지나야 했고, 우리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와 내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30분정도 걸렸다. 학교가 멀다고 하면 엄마는 버스타고 쭉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꺾을 것도 없이 쭉. 그렇게 버스 타는 법을 배워서 매일 등하교를 했고 11살짜리는 지각할 것 같으면 택시를 타는 여유도 종종 부렸다.


 당시 초등학교 앞에는 떡볶이부터 불량 식품, 학용품, 체육복 등 갖가지 준비물을 파는 문구점이 15발자국 거리에 있었다. 주 고객층이 8세부터 13세까지인 이 문구점은 등하교 시간엔 학생들이 어미 젖 찾는 송아지들처럼 모여들고, 그 외 시간은 주인 부부의 휴식 공간이었다. 바깥에 있는 냉동고 위에는 ‘아이스크림 200원’이라고 적힌 찢어진 박스 조각이 붙어있었다. 말은 아이스크림이었으나, ‘우유, 달걀, 향료, 설탕 따위를 넣어 크림 상태로 얼린 것’이라는 아이스크림 정의에 따르면 그것들은 아이스크림이 아니었다. 우유도 달걀도 첨가되지 않고 크림 상태도 아니지만 주인 부부는 그것들의 이름을 아이스크림이라고 지었다. 우유 곽 모양 종이엔 향료와 설탕, 색소로 구성된 주스가 얼어있었고,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을 ‘불량얼음’이라 부르기로 했다. 어쨌거나 불량얼음은 초여름부터 늦여름 아니 초가을까지 혈기왕성한 초등학생들의 간택을 받았다.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아주머니에게 건네면 가위로 입구를 투박하고 빠르게 잘라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바를 숟가락처럼 써서 불량얼음을 열심히 파먹었다. 그러나 유제품이 첨가되지 않은 불량얼음은 마치 물을 얼린 듯 단단해서 쉽게 파지지 않았고 퍼먹는 아이스크림 바도 잘 부서지기 일쑤였다. 불량얼음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20분 정도 기다렸다가 적당히 녹았을 때 잘 부숴가며 녹은 주스와 함께 먹는 것이다. 평균 연령 10세 초등학생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20분은 영겁의 시간이었다. 미취학 아동에게 마시멜로 하나를 주고 15분을 먹지 않고 기다리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주는 ‘마시멜로 테스트’를 다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는 불량얼음의 표면을 가녀린 아이스크림 바로 벅벅 긁어대면서, 진행자가 방을 나가자마자 마시멜로를 입에 구겨 넣는 아이들의 마음에 십분 공감했다.


 그 날은 나와 늘 함께 하교하던 친구가 피아노 학원에 가는 날이어서, 혼자 불량얼음을 사들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막 여름이 끝나가는 늦은 오후라 해는 기울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왔다. 매일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갔지만 그날따라 집까지 걸어가 보고 싶었다. 6개월가량 오고갔던 길인데다가 앞으로 쭉 가기만 하면 되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꺾을 것도 없이 쭉. 그렇게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고 중간 중간에 불량얼음을 긁어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도 안 녹아서 긁을수록 더 딱딱하게 얼어붙는 게 아닐까 의심도 했다.


 초조함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첫 정류장을 걸어서 지난 지 약 5분도 되지 않아 발걸음은 느려졌다. 나무는 다 똑같이 생긴 줄 알았는데 우리 집 앞 길목에 있던 나무와 전혀 딴판이었다. 나무의 피부도 손가락도 향기도, 무엇보다 느낌이 낯설었다. 마치 뒷모습만 보고 친구 인 줄 알고 이름까지 부르며 달려갔는데 알고 보니 생판 남을 만난 듯 당혹스러웠다. 분명 버스가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버스가 멈추는 정거장과 차 신호를 대기하는 도로 근방만 익숙했을 뿐 그 외 차창 밖 풍경은 속도에 못 이겨 늘 흐릿했다. 꺾을 것도 없이 쭉. 믿을 건  이 말 뿐이어서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눈물이 고였다.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차마 11살이 길 잃었다고, 아니 길 헷갈렸다고 울 수는 없었다. 이건 본능이 알았다. 더 이상 손에 든 불량얼음은 맛있는 간식이 아니었다. 안경과 얼굴에 튄 주스 자국과 끈적한 손은 늦여름 낭만 한 번 즐겨보려 했던 초등학생의 비참함을 몇 배로 불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걷다보니 익숙한 거리가 다시 나왔다. 두 번째 정류장 근방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바짝 들어찬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슬쩍 안심했다가 다시 불안해지기를 4번 정도 반복하니 드디어 마지막 정류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진이 다 빠져서 기뻐할 힘도 없었다. 아파트 후문으로 들어서자 평소보다 늦는 날 찾으러 나온 할머니가 보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다그치는 할머니에게 ‘그냥 한 번 걸어 와보고 싶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심장은 두근거렸지만 나의 험난한 모험기를 들려주면 할머니가 걱정할 것 같았다. 이미 겁도 없다며 꾸중을 들은 뒤였으니 말이다. 점점 시야가 확보되고 손에 든 불량얼음도 보였다. 적정 타이밍인 20분을 훌쩍 넘긴 불량얼음은 이미 물이 되어 찰랑거렸다. 지금껏 적당히 녹기만을 기다렸지, 살다 살다 아예 물이 된 불량얼음은 처음 보았다.


 집에 들어가고 나서야 심장의 두근거림은 잦아들었다. 불량얼음의 잔해를 싱크대에 흘려보내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전기장판을 항상 켜두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기장판과 이불 사이로 들어가게 했다. 그날도 그곳에 누워 TV를 켜고 과자를 먹었다. 전기장판의 온기는 불과 몇 십분 전 불안함을 말 그대로 눈 녹듯이 녹였다.


 11살 보다 더 어릴 때, 난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고도 울음으로 그 말을 물리곤 했다. 7살 즈음 아빠와 도서관에 갔을 때, 잠시 나갔다 올 동안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기다릴 수 있겠냔 말에 할 수 있다고 했다. 8살 즈음엔 아빠가 수영장에 날 데리고 가는 대신 여탕과 남탕으로 나눠진 샤워실에서 혼자 씻고 나올 수 있냐고 했을 땐 그러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13층에 사는 할머니에게 고추를 받아올 동안 잠시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땐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와 함께 마트를 가면서 나에게 여기서 각자 다른 길로 갔을 때 누가 마트 맞은편 신호등 앞에 먼저 도착하는지 시합하자고 했을 땐 신나서 먼저 달려갔다. 도서관은 아빠와 매주 자전거를 타고 가던 곳이었고 수영장 역시 동네에 하나 밖에 없어서 그 곳만 갔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살았던 집과 주변 마트도 낯설 리 없었다. 그렇게나 익숙한 공간이었음에도 처음으로 혼자 남겨지게 되었을 땐 울어버리곤 했다. 아무리 사전에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지만 냅다 울어버리는 아이에게 그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은 어른의 몫이 될 뿐이었다. 도서관에서 아빠는 나이가 지긋한 사서에게 한 마디 들었고, 수영장에서는 마침 혼자 목욕 하러 오신 아주머니가 날 대신 씻겨주겠다며 데리고 들어갔다. 할머니 식 과장을 더해서 아파트가 떠나가라 울어대는 내 소리를 듣고 할머니는 가던 길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어린 나에겐 의도하진 않았지만 ‘마스터 키’ 같은 무기가 있었다.


 아무도 몰랐던 4학년의 그 날은 처음으로 마스터 키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날이었다. 물리적인 나이를 먹으며, 이 마스터 키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리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어쩌면 삐져나오는 눈물을 꾹꾹 참는 것이 나에게 ‘성장’으로 작용했던 마지막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때때로 지금의 나는 그 때 보다 더 심오한 이유를 들어 울어버리고 싶지만, 울음을 참는 것은 나에겐 더 이상 성장이 아닌 지극한 상식이다. 어릴 때 유난히 잘 울었던 나에게 엄마는 지금도 새로 산 휴대폰이나 가방을 가지고 현관문을 열면 ‘그거 잃어버렸다고 밖에서 울면 안 돼’ 하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같은 층 주민이 들으면 동네망신이라 재빨리 문을 닫아버리지만 사소한 이유로도 울어버리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나이는 ‘진짜 나’보다 빨리 드는 것이 확실하다. 난 언제나 나이를 뒤쫓으며 나잇값을 빚 갚듯이 지불해왔다. 울지 않고 꾸역꾸역 집까지 걸어온 것이 나름 대견했던 그 날 이후로 난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했다.


 11살 늦여름의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이와 능력에 맞는 ‘온전한 성장’을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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