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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베 May 04. 2021

글쓰기는 사치다

우리 집은 중산층이다. 중산층을 굳이 나눠본다면 오히려 중하층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소위 있는 집 자식들만 한다는 성악을 배우고 어떻게 지금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이야기는 조금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대기업 말년 과장이신 우리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최고의 것을 해주고 싶은 어느 여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자식들의 좋은 학업 성적이 당신에게 큰 기쁨이 되셨는지 배움에 있어서는 늘 주저 없이 물심양면 지원해주셨다. '리베야 너는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렴, 아버지는 빚을 내서라도 너를 뒷받침할 거야'라고 말한 탓에 아쉬운 거 없이 성악, 피아노, 발레, 영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자녀들에게 더 큰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으셨는지 초등학교 졸업할 말미에 가족 다 같이 강남으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이라고 하여도 물가 높은 강남에서 매달 생활비와 세 자녀의 사교육비를 부담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위해 빚을 내시기도 하였으며 투자를 통해 돈을 잃기도 하셨다. 밤마다 부모님께서 소리를 높여 돈 문제로 싸우는 게 일상이 되어갔지만 자세한 집안 경제적 상황을 알리 없는 나는 큰 문제는 아니겠지 하고 넘어갔다.


제대로 집안 사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대학교 때이다. 부모님은 사실대로 말씀해주셨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컸기에 파산 일보직전이었다고. 그래서 강남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더 좁은 집에 이사를 갔을뿐더러 대학 학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그동안 집안 경제적 상황에 무심했던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못 할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 이런 문제들을 쉽사리 말 꺼내기 어려우셨는지 어두움을 가득 품은 얼굴로 말하는데 너무 죄송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이 무거운 짐을 혼자 다 짊어지고 가셨는지 혹시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을지 생각해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맹목적인 아버지의 책임감에 존경이 들었다. 분명 평범한 젊은 청년이 별다른 준비 없이 결혼 후 자녀를 가졌을 텐데 아버지로서, 자신의 삶보다 가족의 안녕을 우위로 하는 중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3살 터울 나는 언니가 먼저 공부로 학비를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과외 알바도 챙겨서 하기 시작하더라. 나도 또한 자연스럽게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여태껏 하던 공부가 실패도 돌아가고 다시 인생을 한번 '리셋'해보고 싶어서 독일 유학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그 생각을 넌지시 부모님께 건넸다. 부모님은 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재정적으로 지원은 어려울 것 같다고 솔직히 말씀해 주셨다.


쉽게 포기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알바로 번 한 1000만 원 조금 안 되는 초기 자금을 가지고 독일에 입국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 친구의 도움으로 어느 한 대학교에서 일 년 동안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일 년이 지나고 다시 선택에 기로에 섰을 때 나는 독일행을 선택했고 아버지가 생활비 일부를 지원해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선택한 결정을 책임지기 위해 학업과 병행해 알바를 꾸준히 해야 했고 독일에서 알바는 코로나 19가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했었다.


그때는 더없이 하루하루에 충실히 살아갔기 때문에 집에 오면 지쳐서 손 까딱 할 새 없이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당시에는 취미 활동할 시간이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일기는 꾸준히 작성했지만 제대로 글을 쓰지는 않았었다.


그때를 돌아봤을 때 불현듯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이 생각났다.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 중 자아실현은 가장 상위에 위치해 있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삶에 대한 욕구에 충족될 때 꼭대기 단계 '자아실현'하는 욕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도 자아실현하는 형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안정되어야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나은 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즉 자아실현을 위해서 글을 쓴다.  


글 쓰는 것을 원체 좋아해 돈을 벌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는 작가 지망생을 일단 제쳐두고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을 두고 얘기해보자. 글은 한글만 알면 모두가 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겉보기에 접근성이 높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왜 모두가 글을 쓰지는 않는가.


그것은 환경적인 요인이 상당 부분 작용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만약 '가난'으로 어떠한 사람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의 문해력은 상당히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외부의 요인으로 글을 이해하거나 쓰지 못한 것이다. 즉 그는 글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또한 당장 생계가 급한 일용직 노동자에는 글쓰기 행위 자체는 그다지 관심 없어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자아실현보다 생존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글을 쓰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삶에 치여 밤 낮 없이 바쁘게 보내는 다수의 직장인들, 혹은 공부할 양이 너무 많아 다른 것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공시생들. 밤샘 작업이 흔한 컴퓨터공학 석사 중에 있는 내 친구처럼 그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 나는 코로나 19를 핑계로 알바를 잠시 내팽겨 치고 부모님에게 온갖 재정적 지원을 맡기고 있다.

당연히 흥청망청 쓰지는 않지만 정년 퇴임을 곧 앞둔 아버지에게 큰 짐을 지운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일을 하지 않으니 공부량이 많아져도 개인의 시간이 늘어났다. 생활 패턴이 안정적으로 들어섰고 자아실현 혹은 취미활동의 욕구가 더없이 커져갔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부를 잠시라도 내려두고 글쓰기에 열중할 때는 어쩐지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혹시 지금 이 시간에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본인의 취미생활 없이 근 30년 동안 뼈를 갈아 일하면서 만들어준 이 평화에서 글을 쓰는 것은 어쩐지 '가끔 이게 맞나'라 생각이 든다. 나에게 글쓰기는 매우 사치스러운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쓰기가 주는 평안함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지러웠던 생각들과 삶의 걱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이 시간이야 말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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