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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베 May 14. 2021

자초한 외로움

극단적 관계지향성을 가진 나는 독일에 와서 외톨이가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을 보니 천천히 여름이 오는 게 느껴진다.

저녁 8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으니 길어진 하루에 어쩐지 여유로움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집안에서 내리 보내는 하루가 지칠 때면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면서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어느 정도 지루함이 상쇄가 된다.

이처럼 혼자 있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졌다. 하루 종일 말을 안 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지만 그 고독함이 어쩐지 싫지는 않다. 고요하고 누구도 이것을 깨지 않으니 온종일 나를 돌아볼 수도 있으며 나의 패턴에 누군가를 끼워 맞춰야 해서 생기는 마찰도 없기 때문이다. 반강제적인 고립은 어쩐지 지금까지 관계에만 치중했던, 친구에 힘과 열을 쏟고 그들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때를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난 관계지향적인 사람이다. 관계 속에서 기쁨과 성취를 느끼고 더 나아가 삶의 원동력을 찾기도 한다. MBTI 성격 유형 검사를 했을 때도 이러한 관계지향적인 부분이 꾸준히 두드러져 나왔을 때는 고개를 연거푸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관계지향적 중에서도 약간 극단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연예인 형'이 내 성격이다. 이 극단적인 사교적인 성격은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을 어렵지 않게 느낀다. 달리 말하면 세상 제일 쉬운 것이 친구 사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 '웃음', '쾌활함', '재미'로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데 적극 활용하기도 하며 친구들 중 '중심' 자리에 들어가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을 대단한 가치로 여긴다. 순간의 즐거움, 유희란 것이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며 내면적인 성장보다 외면적인 것에 치중하는 경향도 있다.


흔히 또래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학창 시절에 이러한 성격은 극에 달했다. 체육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은 애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줄 수 있었던 나의 무대였고 친구들의 반응과 웃음은 삶의 기쁨이었다. 공부를 하러 학교를 간다기보다 애들을 웃기러 학교로 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녔을 것이다. 중학교 때는 'Shortest'라는  3인조 걸그룹을 만들어 애들 앞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이를 녹음해 시디를 굽기도 했었다. 몇몇 친구들과 담임선생님께는 손쉽지만 멋있어 보이는 사인을 연구해서 해주고 직접 만든 로고가 박힌 시디를 헌정했을 만큼 친구들과 재미에 진심이었다. 중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도 다를 바 없이 열심히 모르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다른 반 친구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기도 했었다. 아는 친구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나를 알아 봐주는 건 어쩐지 기쁜 일이었기 때문이다.'오늘 참 잘 살았구나'라고 느꼈을 때는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을 때였다.


이로서 늘어난 지인 한 명과는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해 제대로 '소통'하기보다 그 순간의 즐거움, 재미에 치중했다. 그들이 좋긴 했지만 깊이로 따진다면 한없이 얕은 그런 사이 말이다. 지금까지 추구했던 '친구'의 개념은 그 순간 또는 그 상황에 같이 노는 상대들이었고 또 다음번에 만나서 즐겁게 놀면 되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친구는 10년 넘은 죽마고우도 아닌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재밌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러한 실 같은 관계들은 독일에 와서 끊기게 되었다. 유희만을 추구하는 관계들은 속 텅 빈 강정뿐이었고 결코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만나지 못할 상황이기에 그러한 재미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금방이지 끊어질 그런 관계들을 나는 무수히 맺어왔다. 무엇을 위해 열과 성을 쏟았던 것일까 회의감이 들면서도 앞으로의 관계 맺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그냥 지나칠 남들로 인해 나의 보람, 가치가 정해졌던 나의 과거에서부터 벗어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을 해보았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집착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은 홀로 사는 것.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어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주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거기에 집착할 필요 없이 관계에도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쳐두었던 나를 돌보고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어쩐지 더 가치 있어 보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내면을 우선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어 졌다.


관계에 대한 생각이 변할 수 있었던 독일에서 맺었던 관계들도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것들은 앞서 맺어왔던 것이랑 달랐다. 그들은 어떤 몸짓, 순간적 유흥을  떠나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갔고 그들이 가진 삶의 태도나 관점들은 앞서 느끼지 못했던 나에게 어떠한 도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면적인 것에 치중해 살았던 그들은 나와 달리 무너지기 쉬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닮고 싶었다.'대화'와 '이해'를 통해 상대방의 삶의 태도와 생각들을 알아가는 것은 지금껏 대화 소통과 많이 달랐다. 그들은 대화 스킬이 부족했던 나를 돌아보게 해 주었으며 논리적으로 세상을 보게 해 주었다.


그저 한국에만 있었다면 가볍게 넘길 수 있었던 그럴만한 것들. 하나부터 열까지 어쩐지 나는 깨닫지 못했을 삶의 태도에 대해 점점 알아가고 있다. 삶에 대해 진중한 태도와 모습을 갖음으로 오늘도 나는 한 뼘 정도 성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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