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헌정하는 글
평생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순리대로 인연을 맺은 한 남녀의 이야기다.
우연처럼 그들은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하지만 학번과 과가 달랐기에 그들이 서로 알리가 없었다.
어느덧 결혼할 혼기가 찼을까 한 중매쟁이로 인해 한 여자와 남자는 마침내 마주 서서 서로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자가 보았던 그녀는 아담한 체구에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을 품고 있었고 여자가 보았던 남자는 어쩐지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를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여 의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난 첫 만남이었기에 얘기는 순식간에 흘렀다. 빨리 날을 잡기로. 남자의 아버지는 위독한 상태였고 막내아들의 결혼을 보고 가셔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고작 세 번을 만나고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식장에 들어섰다.
너무 급한 결혼이었을까 서로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종교, 생각, 취미, 자라온 환경이 180도 달랐다. 남자의 아버지는 1910년대 태어났기에 특유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많이 가졌고 그것을 6남매의 막내아들이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반면에 여자는 삼 남매의 장녀였고 그녀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 취미를 무리 없이 일궈낼 수 있었다. 세상에 행복한 것만 가득했던 그녀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나고 나서 어쩐지 무너져 가기만 했다. 그들은 싸움을 통해 서로를 이해했던 걸까 언성이 높아지는 날이 일상이었다.
일 년 후 첫째가 태어났다. 아이는 둘만 있던 가정에 윤활제가 되어줬다. 그녀로 인해 두 남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자주 피곤했다. 그 후 둘째, 셋째가 생겼고 그는 감정표현이 서툴렀기에 자녀들에게 사랑을 물질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고 그녀는 감정적으로 교류하는 등 자녀들에게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어줬다.
남자는 세상에서 자식들이 제일 소중한 듯 자신을 희생해 입혔고 가르쳤고 먹였다. 여자는 남자가 채워주지 못했던 사랑을 가득 채워줬다. 자식들은 그 덕분에 모자란 것 없이 자랐고 그 남자와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시간이 지나 자녀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의 터를 떠날 때 그들은 잠시나마 삶의 방향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평생 중 자식이라는 소통의 매개체가 빠져나가니 시원섭섭하다고 할까. 아니 오히려 어쩐지 외로웠다.
이제야 둘만의 시간이 많아졌기에 그들은 가끔은 꽃을 보러, 가끔은 산에, 가끔은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닌다. 그동안의 시간을 부족했던 충족시키려는 걸까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대화 주제는 끝이 나지 않는 뫼비우스처럼 돌고 돈다. 얘기해도 답이 나지 않는 것들,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는 것들. 그래도 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에 서로에게 의지하면 산다.
그게 그 남녀의 결혼생활이었다.
그들의 모든 삶의 중심은 '자녀'였다. 그들에게 자녀들의 행복과 성취는 그들을 웃게 만들고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러니 자녀들이 어느덧 커서 자연스럽게 그대들의 터를 벗어나게 됐을 때 그때 왔던 상실감은 말도 못 했을 것이다.
그게 그들의 결혼 방식이었다.
자식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표현 하지만 서로에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데면데면한 그런 사이.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느 부부들처럼.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자식들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자식은 자고로 부모에게 받은 것 밖에 없어서 은혜를 말하라고 하면 셀 수 없지만.
반대로 부모들이 자식에게 받은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건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무한하고 보답 없는 사랑들을 어찌 그대들은 그렇게도 퍼줄 수 있단 말인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게 도와주시고
미리 겪은 삶의 지혜들로 좀 더 자식들이 당신들보다 편한 길을 걷게 하고자 조언해주시고
자식들의 선택은 존중하지만 누가 보기에도 잘못한 선택을 한다면 지구 끝까지 쫓아와 뜯어말리실 그대들.
그대들의 사랑의 깊이를 비록 타지에 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대들의 노고와 보이지 않았던 도움들. 그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회사 끝나고 부리나케 달려와 늦더라도 자리에 착석해서 언제나 연주회 자리를 지켜주시던 아버지.
입시 때 지칠까 봐 매일 아침저녁이고 고기반찬을 먹여주셨던 어머니.
딸의 꿈을 짓밟지 않고자 어려운 형편에도 유학을 지원해주시는 아버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겪었거나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누구보다 마음 아파해 주시고 공감해줬던 어머니.
한강에서 따릉이를 같이 타면서도 딸이 혹여나 넘어져 다칠까 봐 항상 뒤에서 달렸던 아버지.
딸이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가 항상 걱정인 어머니
딸이 한국에 들어갔을 때 못 먹었던 음식, 옷들, 장소들을 데려가 주시느라 바빴던 부모님.
그들은 어쩐지 세월이 지나면서 유해졌다. 아니면 내가 성장할 것 일까.
그들의 삶의 방식이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공감만 될 뿐이었다. '아, 이래서 어렸을 때 그렇게 말씀했구나'. '이래서 그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세월이 좀 더 흐르게 되면 더 이상 이질감 없이 그들이 백 퍼센트 이해가 될까.
그들이 누구보다 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
혼자 지내는 이 집에 그들의 부재가 느껴져 사무치게 그리운 오늘이다.
엄마, 아빠 제가 많이 사랑해요.
저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편지 원문]
사랑하는 부모님께,
비록 제가 지금 해외에 있기에 감사한 마음을 직접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전해질 수 있게 이렇게 편지로 써보도록 할게요. 편지는 보낼 수 없으니 브런치에 같이 올릴 거예요.
아빠! 전 한 평생을 돈 쓰는 기계로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뭐하나 뚜렷하게 이루지 못했어요. 나이는 계속 먹어가는데 경제적 독립을 아직 못한 것도 너무 죄송하고 큰 짐을 지워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부담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딸의 꿈을 끝까지 밀어주고자 지겨운 회사를 바로 그만두지 않고 혹시 정년퇴직이 조금이라도 밀려질까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평생을 일만 하게 희생시킨 느낌이라 나중에 제가 그만큼 보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엄마! 항상 유학 중에 힘든 일이 있거나 했을 때 정신적으로 지지해주는 엄마 덕분에 아직도 안 때려치우고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항상 걱정이 가득한 엄마지만 그래도 전 최소한의 걱정을 끼치면서 살고 싶어요.
부모님! 딸의 이야기를 항상 궁금하고 계속 관심을 가져줘서 너무 감사해요.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