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주로 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지금은 ‘주로’가 아니라 ‘ 때때로’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겁이 많고, 완벽주의이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성향은, 작은 시골 마을에 나를 붙잡아 두고, 어디에도 갈 수 없고, 무엇도 시도해 볼 수 없게 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힘이 센 아버지 또한 저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잔뜩 하는 겁 많이 분입니다.
부녀는 그저 주어 진대로 사는 것에 감사하며, 또 해내며 살았습니다.
그랬던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저답게 첫 남자친구와 첫 연애를 하고, 결혼을 결정했지요.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결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애 딱 한 번만에 결혼을 했으니까요.
부녀와는 달리 엄마는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분입니다. 엄마 덕분에 결혼이 쉽게 승낙되었고, 덩달아 이민도 아주 쉽게 허락을 받았지요.
결혼초반, 그러니까 이민 초반에는 변화가 감당되지 않아 엄마를 원망까지 했었습니다. 그 모든 큰 변화에 대한 허락을 너무 쉽게 한 엄마의 탓 같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삶을 무너트리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오랫동안 까만 자루 속에 갇혀 지내며, 온갖 좋지 않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까만 자루 속에 갇혀 지내면 신선한 새 공기가 어떤 냄새인지, 햇살은 어느 정도로 따사로운지, 나무는 얼마나 푸르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루 속 공기만 들이마시고 내뱉을 뿐이지요.
어느 날, 일기장을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내 일기장은 온갖 안 좋은 말들만 모아 놓은 나쁜 말 국어사전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니까, 일기장을 감정 쓰레기통처럼 써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때였는데, 그런 일기장을 모두 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보이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은 나를 꾸미기에 딱 좋았습니다.
머릿속은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로 꽉 차 있었지만, 글은 긍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처럼 꾸며 써 보았습니다.
내 글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 힘을 내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지요.
또 좋은 글들을 쓰니까 좋은 생각을 하게 되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 만 같았습니다. 기분이 좀 더 좋아지는 것도 느꼈지요.
그러다 글 속에서 거짓된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글처럼 살지 않는 나를 말이지요.
내 주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을까 여전히 두려웠던 때였습니다. 글과 실제의 나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지요.
언젠가부터 나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긍정적인 행동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긍정적인 글을 쓴 후 그에 따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날은 한풀이를 하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이내 마지막 마무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써내려 가는 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하루 한 줄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르쿠스처럼 하루 시작을 한 줄로 쓰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습니다.
일분도 채 걸리지 않는 한 줄 아침 일기는, 제법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나로 이끌어 주는 것 같습니다.
내가 쓴 글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내가 쓴 글을 지인이 읽어도 당당한 내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줄 일기를 쓰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나로 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