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관한 단상
우리 대부분은 어떤 옷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날의 날씨와 나의 상태, 만날 사람과 해야 할 일들을 고려해 선택한다. 혹은 깊은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고르기도 한다. 옷장을 헤집어서 입고 벗기를 반복하며 고르는 사람도 있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커처럼 옷을 고르는데 쓰는 시간조차 아까워 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검은 터틀넥 니트와 청바지를 입는 것도 자기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제복을 입지 않는 대부분의 현대인은 어쨌든 자신의 선택으로 옷을 입는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는 하지만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교육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길러졌기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어울리기에 적합한 범위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다. 복장규율이 없다 해서 비키니를 입고 출근하지 않고, 장례식장에 반짝이 드레스를 입고 가지 않는다. 선택권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패션은 문화적 산물이므로 언제나 그 사회와 문화가 용인하는 범위에서 움직인다. 이따금 매우 급진적인 패션은 논란이 되지만 다수가 받아들이면 새로운 문화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1960년대의 미니스커트, 1990년대의 배꼽티가 진통을 겪으며 정착한 것처럼.
특정인에게만 강요되는 옷
그런데 선택의 권리가 사회 구성원 간에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를들면 A는 입어도 되고 B는 입을 수 없는 옷. 혹은 A는 입어야만 하고 B는 입지 않아도 되는 옷.
근대 이전에는 종종 옷으로 계급을 구분 지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색, 문양, 소재, 장식 등으로 지위고하를 구분 지어 누군가에는 권력을 부여하고, 다른 누군가는 속박당했다. 고대 이집트의 노예는 머리를 삭발해야만 했고, 17세기 프랑스에서 빨간 굽의 구두는 왕족만 신을 수 있었다. 패션을 독점해 권세를 과시하거나, 패션을 강요해 예속시켰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통틀어 여성에게만 집중 적용되어 힘을 부여하거나 제거해 온 패션이 있다. 바로 베일!
얼굴 또는 머리카락을 가리는 천을 뜻하는 베일(veil)은 유독 여성에게만 국한되어 왔다.
성모마리아의 푸른 베일, 결혼하는 신부의 면사포, 조선시대의 쓰개치마, 이슬람의 히잡과 부르카.
베일은 얼굴을 은폐하여 시선을 차단하고 외부로부터 단절시킨다. 또한 함부로 가림막을 들춰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숭고하고도 신성한 힘을 가진다. 그런데 베일의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었고 베일을 강요하는 문화는 여성에게 강조되던 덕목인 정조관념과 관계가 깊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장옷'과 '쓰개치마'도 남녀가 유별하여 여자들의 외출을 제한하던 유교 탓이 크다. 남존여비 사상의 산물이다. 고려시대에 '몽수'라 불리던 여성들의 베일이 있었으나, 몽수는 일부 귀부인들의 사치재였지 여성에게 강요하던 것이 아니었다.
옷 입을 자유 혹은 옷 입지 않을 자유
얼굴 가리기를 강요하는 체제에 순응함으로써 여성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성에게 강조되는 가장 큰 덕목, 정숙함이다. 거꾸로 체제에 순응하지 않을 때는 가치 박탈과 사회적 억압이 뒤따른다. 그 사회가 요구하는 최고 덕목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가치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의 부모와 형제도 함께 손가락질받고 불이익을 겪게 된다. 따라서 가족을 비롯한 온 사회는 촘촘하게 얽혀 여성이 베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인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베일은 누군가에게 강요된다.
어떤 이슬람 국가들은 단 몇 줄의 종교 율법을 저마다의 해석으로 정치화한다. 그리고 베일은 전통과 문화의 이름으로 종속관계를 만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히잡을 똑바로 쓰지 않았다고 도덕경찰에게 체포되거나 남성에서 구타당하는 여성들이 있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히잡 쓰지 않기를 지지함으로써 구속되고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옷 입지 않을 권리, 신체를 드러낼 자유가 남녀 동등하게 허용되지 않는 이상한 현실이다.
반대로 유럽 일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지 말라는 히잡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다. 프랑스는 라이시테(laïcité)의 원칙에 따라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는 대표적 국가이다. 프랑스는 종교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며, 어떤 종교적 표식도 과시적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이유로 공공 교육시설과 기관에서 히잡을 금지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라고 거세게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 히잡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선택이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무슬림 이민자 2-3세 들은 히잡 금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오히려 히잡을 쓰기 시작하기도 했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의 지위
어떤 문화권 안에서 성장하고 살아가며,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적 사고를 하는 것은 어렵다. 여성들의 베일 쓰기가 자기 자신의 주체적 선택이라고 믿는다 해도, 실은 주입된 정체성일 수 있다.
그렇다고 '히잡 쓰고 살려면 너네 나라로 가든가'라는 식의 대처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유럽 열강에 의해 수탈당했던 무슬림들이 자의와 타의로 타국에 정착하게 된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삶의 터전을 일궈온 곳을 떠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에 따라 개인에게 위해가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에 관해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는 것. 선택권이 없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동등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위에 있다는 의미이다. 율법 몇 줄의 해석으로 옷을 강요해 주종관계를 만들고, 억압하고 살해하는 것이 그들 신에 대한 신앙이라면 그것은 종교를 벗어난 것이다.
겨우 천 조각에 불과한 것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고 인간을 가혹하게 다루고 죽인다.
마르크스의 말이 맞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