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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an 22. 2023

패션 디자이너가 괴로운 이유 (1)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괴로울 수 있단다

얼마 전 지인의 부탁으로 한 중학생과 인터뷰를 했다.

학교 숙제로 자신이 꿈꾸는 '패션 디자이너'에 대해 취재를 해야 한다며 인터뷰를 부탁했을 때, 나는 사실 조금 망설였다.


'그 일로 인해서 당신은 행복한가요?'

라는 질문을 하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나의 섣부른 대답이 한 아이의 인생궤도를 바꿔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는 본인이 야무지게 준비한 질문만을 던졌다.

왜 그 일을 택했나요? 그 일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그 일을 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요?.. 등등의 예상했던 질문에 나는 성실하게 답했다.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 vs 의미 있는 일

한때 나는 세계 최고로 괴로운 패션 디자이너 였다.

누군가와 괴로움 배틀을 해본 적은 없지만, 당시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괴로운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었다. 자기 확신 결핍 환자인 내가 스스로 인정했다면 그건 진짜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회사는 동일계열 조닝(zoning)에 포지셔닝한 브랜드들, 그러니까 백화점의 한 층에 입점한 브랜드들 중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매출 높은 곳. 쉽게 말해 소위 '제일 잘 나가는' 패션회사의 디자이너였는데 얼마나 괴로웠던지 출근하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정도였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느라 괴로운 건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설정한 '패션디자이너'라는 목표를 위해 적합한 전공을 하고, 유학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일을 잘하지 못해서 괴로웠냐고 묻는다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대개 감각 좋고 일 잘하는 디자이너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러한 평가는 내 영혼과 육신을 모조리 갈아 넣은 결과였으니, 효율적으로 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내밀하게 나를 지켜본 사람인 남편은 나에게 '단거리 선수처럼 달린다'라고 표현했다.

50퍼센트의 에너지를 투자해 80퍼센트의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것과 12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아붓고 95퍼센트의 결과를 얻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지속가능하겠느냐며. ISTJ 답게 언제나 ENFP인 나를 워~워~ 진정시켰다. 

그러나 나는 계획적으로 체력과 시간의 안배를 할 줄 모르니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달리다가 방전되기를 반복했다. 필 꽂히면 밤새 일하고 또 늦잠 자고, 평가와 반응에 휘둘리다가 폭식하고. 일상이 늘 불안정했으며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패션 산업의 주기는 매우 빨라서 의미를 탐색할 시간 따위는 사치처럼 여겨졌다. 적절한 휴식과 영감으로 마음이 채워지지 않은 채 아웃풋을 기계적으로 쏟아내는 직업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나 자신을 갉아먹는 것 같아 퍽이나 괴로웠다. 세계 최고로 괴로웠다.

더 힘든 점은 내가 올인하겠다고 결심한 그것은 어쩌면 그리 가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은 라벨갈이와 무단도용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철학은 없어도 허세는 있어야 했다. 그것은 사람의 계층을 나누어 차별을 유도하고, 지구를 병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무척 흔들렸다.


옷은 그냥 옷일 뿐이야

어떤 사람은 내게 자의식 과잉이라고 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더 잘해야 된다는 강박, 나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정욕구, 나의 직업은 숭고해야 한다는 지나친 의미부여. 나를 병들게 하는 건 결국 지나친 애착이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혹은 누군가의 삶을 바꿔버릴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다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반드시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괴로울 수도 있단다.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어. 뭐, 인생이 꼭 행복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그런 삶을 좇는 사람이라면 많이 힘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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