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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월 Oct 25. 2021

엄마랑 멀리 떨어져서 살고 싶어.

하지만 엄마가 그리워.

 난 자취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호주에 있을 때도 셰어 하우스에서 2인 1실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에 돌아와 대학생활을 할 때도 우리 집이 시골이라 버스+지하철로 편도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걸리는 학교를 다녔지만 통학을 했다. 그 당시 서울권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아닌 이상 거의 자취 생활을 하거나 차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자취라는 것이 굉장히 부러웠다.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엄마와 2년 정도 함께 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계속 엄마와 함께 생활을 했다. 여리고 부지런하고 청결한 엄마와 달리 드세고 게으르고 더러운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와 싸웠다. 어린 시절에는 매일 혼나기만 했지만, 내가 머리가 크면서 엄마와 대립해서 싸우고 있었다. 흔히 엄마와 딸이 싸우는 이유 중 하나인 청소부터 시작해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엄마와의 대립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엄마가 삐져버리면(지금 생각해도 삐진 게 맞다) 한 달을 넘게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을 거는데 대답을 안 해버리니 결국 나도 말을 걸지 않았다.


 우리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병시중, 혹은 집에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흐지부지 화해하게 됐는데, 엄마와 나의 관계는 무려 내가 30살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엄마와 나의 사이는 크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점점 나는 더 앙칼지게 엄마를 대하게 되어버렸고, 특히나 내 직장생활이 바빠지면서 더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물론 엄마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나는 엄마가 불편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분가를 하게 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함께 살던 집에서 엄마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다. 내 세상 같았다. 집을 어질러도 잔소리를 할 사람이 없다. 주말 내내 종일 잠을 자고 먹은 맥주 캔들을 쌓아놔도 혼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한동안 계속해서 전화로 잔소리를 하거나 집에 와서 어질러진 모습을 보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집에 신경 써. 나는 좀 내버려 두고."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엄마가 새로 사는 집은 차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필요한 물건이 있거나 내 손이 필요할 때는 어김없이 나를 불렀고,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달려가 프린터를 고쳐준다거나, 컴퓨터를 고쳐준다거나, 새로운 전자기기를 연결해준다거나, 엑셀 파일을 만들어 주곤 했다. 흔히 엄마네 집에 가면 반찬을 가져온다는데, 나는 특이한 케이스인지 내가 반찬을 해서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었다. 친구들은 엄마랑 내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던 엄마가 늘 붙어있던 엄마가, 지난달 시골로 이사를 갔다. 차가 막히지 않아도 거의 왕복 5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가 이사 가던 날, 원래의 계획은 오후에 잠깐 들릴 예정이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8시 조금 넘어서 도착을 했다. 엄마와 아부지는 이미 나와있었고 빌라의 이웃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계획이 변경되어서 일찍 내려가게 된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오후에 갔다면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이웃들과 사이가 워낙 좋았던 지라, 인사를 하다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엄마는 강하다고 하는데, 내 머릿속에 엄마는 한 없이 여린 소녀로 자리 잡고 있어서 인사하면서 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침부터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속상했다.


 비타 500 2박스를 들고 간 나는 이삿짐 직원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한 뒤 엄마를 배웅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핸들을 잡는 모습을 보고 운전 조심하라고, 도착해서 연락하라고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벌러덩 누웠는데 갑자기 쓸쓸해졌다. 엄마가 멀리 갔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가기 전까지만 해도 빨리 가버리라고 엄마랑 멀리 있어야 엄마 잔소리를 안 듣고 심부름을 안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거리가 멀어지니까 괜히 쓸쓸했다.


 주말이 지나고 출근을 했는데, 회사 직원의 친척 동생이 아프다고 했다. 헌혈증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가 아팠던 게 생각이 났다. 나는 다행히도 헌혈을 꾸준히 하는 편이었다. 지금은 타투를 해서 헌혈 금지 기간이지만, 가능하다면 바로 헌혈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헌혈을 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울어버렸다. 회사에서 눈물이 왈칵 올라와서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창피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30년을 넘는 세월을 살면서, 초등학생 시절을 제외하고 엄마가 보고 싶은 건 처음이었다. 스스로 웃기기도 했다. 엄마랑 그렇게 싸워놓고 빨리 가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편함 위에 청개구리도 있다! 망부석처럼 한참을 있다가 간 청개구리.


 그 주 주말, 옆사람과 함께 엄마와 아부지의 새 보금자리에 갔다.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다 보니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걸렸다. 새 집은 정말 엄청난 시골 중에도 시골이었다. 새 집은 창이 굉장히 컸고, 창 밖으로는 넓은 밭과 산이 보였다. 집 앞에는 정원도 있고, 수돗가도 있고, 자갈도 깔려 있었다. 가족들과 술을 한잔하고 준비해 온 불꽃놀이로 조카들과 놀아주고 옆사람과 나와서 하늘 구경을 했다. 깜깜한 하늘엔 수 없이 많은 별이 뿌려져 있었다. 집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달과 별을 보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데, 우리 집도 별이 잘 보이는 편이었지만 시골은 달랐다. 정말 반짝반짝 거리는 데, 기분이 좋아져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술 때문에 살짝 뜨거워졌던 몸 안에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들어가니 행복해졌다. 캠핑 의자를 펴고 한참 동안 별을 바라봤다. 집에서는 별을 보면서 YouTube로 풀벌레 소리를 틀어놨었는데, 엄마의 새 집은 라이브로 ASMR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폰 12 pro max로 찍은 별. 날이 좋을 때는 은하수도 보인다고 했다.


 일요일 낮에 올라올 생각이었는데, 차가 막히는 것도 고려하고 온 김에 조금 더 있고 싶어서 저녁때 겨우 출발했다. 아침부터 밭에서 고구마도 캐고 점심도 먹고 낮잠도 자고 엄마랑 이런저런 대화들도 하다가 출발했는데, 집에 오는 길에 괜히 아쉬워졌다. 큰 조카도 뭐가 그렇게 아쉬웠는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엉엉 울었다. 걸어서 집에 가야지 다시 올 수 있다며 차를 타지 않겠다고 엉엉 울었다. 귀여웠는데 왠지 내 마음도 조카와 같아서 찡해졌다.


 아부지의 항암치료로 인해 엄마와 아부지는 꽤나 자주 서울에 올라온다. 하지만 거리가 워낙 멀고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기에 자주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엄마가 멀리 가고 나서야 나는 엄마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묻는 사람이 되었다. 할아부지의 부재로 '후회하지 않을 말'들을 하자고 다짐을 했지만, 엄마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다. 엄마한테는 왜 그렇게 쏘가리마냥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엄마의 존재가 너무나 당연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무뚝뚝한 건 고칠 수 없지만, 그래도 안부 전화하는 횟수가 늘어가고 엄마가 보고 싶어 지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면,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그 시골집에 방문하기 힘들어질 테니, 다음 달에 시간을 내서 엄마를 보러 가야겠다. 그때는 엄마랑 아부지가 좋아하는 간식들을 잔뜩 사들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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