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어차피 게으름
과연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까.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그제야 시작한다. 그 미뤄짐 당한 것들 중에도 오롯이 나를 위한 일은 혹은 하고 싶어서 리스트에 담아두었던 것들은 결국 데드라인을 놓쳐, 하지 못하는 일이 되어버리거나 여전히 리스트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차례를 기다린다. 아이폰의 미리 알림에 등록해 둔 일이 수십 개이지만 결국 모두 삭제되어 버린다. 위시리스트에 있는 영화와 책의 목록, 하고 싶은 일들은 계속해서 쌓여만 간다.
여전히 개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유화 그림 그리기 세트와 1,000피스 퍼즐이 배송되어 온 그 상태 그대로 고스란히 방구석 혹은 책상 뒤에 있다. 한꺼번에 사들인 책들은 편리한 전자책에 밀려 또는 새롭게 발견되고 구매된 책들에 의해 고스란히 책장에 놓여있다.
게으름은 끝이 없어서 17시 30분까지 나를 잡고 있다가 언제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알람소리에 조금만 더 게으르면 안 되냐는 얼굴로 애처롭게 날 바라본다. 하지만 더 이상 게으름에 붙잡혀 있다가는 피할 수 없는 잔소리들과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는 시간 때문에 게으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미뤄둔 일을 하러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선 적당히 신나지만 시끄럽지 않은 노래를 튼다. 요즘엔 그 좋아하던 노래들이 시끄럽게만 들려 조금 우울한 노래들을 틀어두는 편이다.
식기 건조대에 있는 그릇들을 정리하고, 싱크대에 있는 아침, 점심의 흔적들을 치운다. 배가 고파서 아침, 점심 중 한 끼 정도는 대충 챙겨 먹지만 먹지 않는 날도 많다. 그런 날에 싱크대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마신 흔적과 물을 마시던 컵들이 뒹군다. 소파나 바닥에서 뒹굴던 강아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와 다시 바닥에 엎어진다. 아마 가장 부러운 인생이 아닐까. 다음 생이 있다면 원래 꿈이던 ‘에펠탑이 보이는 바다에 사는 고래’ 말고 ‘여름엔 24시간 에어컨을 틀어주고 소고기 반찬을 주는 부잣집에 유일한 강아지’로 태어나고 싶다.
설거지를 마친 뒤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은 나 혼자 먹는 게 아니니 미루다 못해 버려지는 일에 포함될 수 없다. 혼자 있을 때는 하루에 1끼는 무슨, 2-3일에 1끼 정도 먹고 그냥 물이나 커피만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더운 날씨에 힘들게 일하고 온 남편까지 굶길 순 없어 서두르기 시작한다. 시골 저온창고에서 가져온 쌀을 김치냉장고에서 꺼내고 세 번 정도 행군 뒤 전기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냉장고를 뒤적여 간단하게 국이나 찌개를 끓이고 다시 벌러덩, 소파에 눕는다. 온종일 선풍기 하나로 버티다가 남편의 퇴근했다는 전화에 그제야 에어컨을 켠다.
아픈 강아지와 분리되어 있는 다른 강아지들의 저녁을 챙겨주고, 청소기를 돌리고 시계를 보며 남편을 태우러 나갈 시간을 체크한다. 워낙 더운 날씨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5분 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게 움직인다. 남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 사실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남편이 그 꼴을 보지 못해 바로 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 달 정도 됐나.
난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 더 부지런했다. 남편보다 30분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나서 강아지들 밥을 주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출근을 한다. 보통 회사는 10-20분 전에 도착해 담배를 하나 핀 뒤 사무실에 올라가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내려온다. 그리고 오늘 할 업무를 미리 체크한다. 점심시간엔 굶거나 샌드위치 혹은 커피로 대충 때우고 일을 한다. 퇴근하기 1시간 전쯤에 당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다음 날 할 일을 미리 정리하고 주변 사람들의 일을 돕는다. 물론 이건 최근에 일했던 직장에서는 불가능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출퇴근을 할 때는 라디오나 BBC 뉴스 같은 걸 들으며 책을 읽는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저녁을 먹는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강아지들 밥을 챙기고 서재에 앉아 공부를 한다. 책도 읽고 보고 싶었던 영상들을 본다. 그러다가 12시가 넘으면 침대에 누워 또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2시쯤 잠이 든다.
지금의 나는 남편이 출근준비를 마칠 때쯤 일어나 출근을 시키고 집에 돌아와 그저 멍하니 누워있는다. 오늘의 할 일을 생각하지만 움직일 기분이 날 때까지는 약 9시간 정도 남아있다. 날이 덥지 않을 때는 강아지랑 산책을 하고 조금 기운이 나는 듯했지만, 프렌치 불도그인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습한 여름에 산책을 하다가는 농담 안 하고 정말 죽을 수도 있어서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테라스에서 물놀이를 종종 해주기는 하지만, 여름은 어쨌든 정말 싫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 이 습하고 끈적거리고 뜨거운 날씨는 견디기가 힘들다. 여름에 우울증이 더 심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8시 30분쯤 ADHD약인 콘서타와 우울증 약을 먹고 강아지 밥을 챙긴 뒤 회사에 도착했다는 남편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 가만히 누워있는다. 옆에 누운 강아지를 쓰담쓰담하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남편의 출근 소식을 듣고 나면 TV를 켜거나 핸드폰으로 공포 게임 영상을 본다. 원래도 공포 영화나 게임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고 게을러질 때 자극을 주기엔 딱 적당하다. 무서운 이야기도 자주 듣는 데, 듣다 보면 자꾸 잠이 와서 잘 때 ASMR로 틀어놓으려고 하는 편이다. 아니면 서재에 앉아 웹서핑을 할 때 듣기에 좋다.
하루 종일 뭘 했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한 게 없으니 알리가 없지.
난 게으른 나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지도 않는다. 여유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며 게으름을 즐기는 시간을 사랑한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게으른 사람이지만 나름 계획이 있다. 놓쳐버리거나 계속 미뤄지는 계획들이 난무하지만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하겠지. 내일쯤에는 기운이 넘쳐서 내일 당장 모든 걸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여러 생각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는 것도 포함된다. 누군가는 책을 읽는 행위를 그저 ‘취미 활동’이라고 말하지만, 난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사람이 되었다.
만약 책이나 영화, 끊임없는 공상이 없었더라면 난 그저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의 언어를 하는 짐승에 가까웠을 것이다. 스스로 배우는 걸 좋아하던 어린 짐승은 여전히 스스로 배워가는 걸 사랑하는 어른인 인간이 되었다.
사실 빠르게 처리할수록 좋은 일들이 여전히 내 할 일 목록에 있지만, 확실한 건 오늘 할 일은 아니다. 내일의 내가, 일주일 뒤의 내가, 한 달 뒤의 내가, 오늘의 나를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두 달 뒤의 나는 한 달 전의 나를 잘했다고 말하겠지. 오늘의 나는 우울에 잠식되어서 그저 숨 쉬기조차 버겁다. 미루기 위한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하지 않는다고 문제 될 건 없으니까. 우울의 늪에서 발버둥 칠수록 더 깊게 잠겨버릴 테니 늪이 날 밀어주길 조금만 기다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