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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싱인더레인 Feb 25. 2022

Episode27. 혼자만의 시간 갖기

걷기의 즐거움




난임 생활 중 나의 대표적인 움직임은 ‘걷기’이다. 사실 걷는 것은 운전을 하고 다닌 이후로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난임 기간 중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인 ‘과배란 시기’에 많이 걸으면 자궁 혈액 순환이 잘 되어 난자가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이 시기에 남편과 매일매일 걸었다. 무려 만 보씩. 이때는 걷는 게 ‘일’이었다. 그래도 걷고 나면 주사로 인해 몸이 무거워지고 기운이 없는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걸으면서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나 혼자 감당하는 일’이라는 억울함도 가셨다. 그러다 이식을 하고 나면 걷는 것도 혹시나 착상에 방해될까봐 필요할 때만 걸었다. 물론 나는 한 번만에 착상이 되는 기적을 맛보지 못했기에 그 이후로는 틈만 나면 걸었다. 이땐 혈액 순환보단 갑갑해서 걸은 적이 더 많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뭔가 노력하고는 있지만 언제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난임 생활. 그 안에서 울기도 해보고, 강박적일 정도로 ‘좋다는 것’은 다 찾아서 해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때. 그때는 그냥 걸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계속 ‘왜’라는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연속적으로 하다 보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졌다.      


걸을 땐 달랐다. 시선을 외부에 두다 보면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잠시 가라앉힐 수 있었다. 휴직을 하고 나서 좋은 점은 가끔 내가 ‘걷고 싶은 곳’에 찾아가서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가슴이 갑갑할 땐 탁 트인 바다에 가서 걸었다. 해변가를 걸을 땐 사각사각 느껴지는 모래의 감촉이 나를 감싸주는 느낌이 든다. 파도가 밀려들었다 멀어질 때 모래사장이 아무 흔적 없이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서, 내 어지러운 마음도 조금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걸을 땐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가고 싶을 땐 내가 편한 속도에 맞게 나아갈 수 있었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준 건 어쩌면 내가 매일 해왔던 ‘걷기’였을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동네 산책은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때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었다. 나는 임신을 준비하기 전에도 하나를 떠올리면 그것에 대해 강박적으로 파헤치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몸에 ‘혹’이 하나 생기면, ‘그 혹이 왜 생겼나, 어떤 질병의 한 형태이지 않을까, 이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 내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면 어떨까’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곱씹는 것이었다. 그 혹이 내 몸에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했다. 때론 이런 나의 성격이 ‘문제 해결’을 최대한 빨리 하게끔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때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난임’의 경우는 ‘내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고, ‘빨리’ 해결할 방도도 없었기 때문에 집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내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땐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따뜻한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난임’이라는 문제는 ‘지금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갖자고 나 자신을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걷다가 힘들면 멈춰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예쁜 풍경이 보일 땐 잠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걷기를 통해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닐 땐 의사 선생님의 처방과 내 몸의 흐름에 따라 시술을 받느라,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도 시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걷다가 멈추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나에게 더 열심히, 빨리 걸어야 한다고 재촉하지 않았다.      


걸으면서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 들어가 빵이나 소소한 물건들을 사 오는 것은 걷기의 또 다른 재미였다. 사실 그냥 먹고 싶을 때 빵을 먹는 건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난임 생활을 하기 전까진 남편도 나도 빵을 좋아해서 주말 아침은 늘 ‘빵’으로 식사를 대신했고, 여행을 가기 전엔 유명한 빵 맛집을 먼저 검색해보았다. 빵과 같은 ‘밀가루’ 음식이 찬 성질을 가지고 있고, 혈당량을 급격히 높여 임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턴 의식적으로 줄이려고 노력했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걷고 난 뒤 먹는 빵은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아예 안 먹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걷고 난 뒤 ‘맛있게’ 먹었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걸으며 ‘책’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걷다가 힘들면 동네에 있는 서점에 가서 읽고 싶거나 어떤 내용인지 궁금한 책을 펴 들고, 잠시 앉아서 읽기도 했다. 집에서 읽는 책보다 그렇게 잠깐잠깐 읽는 책이 오히려 기억에 남는 경우도 많았다. 걸으면서 머릿속 생각을 어느 정도 비워서인지 책 내용이 쏙쏙 들어왔다.     

걷는 시간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 팔다리의 움직임이 어떤지 내가 어떤 속도로 걷기를 좋아하고, 무엇을 보며 걷는 걸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난자를 건강하게 키우는 데 좋다고 해서 시작한 ‘걷기’. 그 움직임을 통해 나를 더 알게 되었다. 물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이렇게 나를 알아가는 산책 시간을 ‘자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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