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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뒷모습


지난 이른 봄, 쨍한 겨울 햇살에 따스함이 스민 날이었어요. 미술관 직원들은 블루밍 메도우의 마른 풀들을 정리했어요. 긴 가위로 굵고 억센 줄기를 자르기도 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같은 꼬랑사초를 밤톨처럼 깎아 놓았지요. 물기 하나 없이 바삭 말라있는 풀들을 솎아내며 이곳에 정말 초록 생명이 다시 태어날까 궁금했어요. 


살며시 봄이 녹아들어 부드러워진 땅에 작년 가을 심어놓은 감자알 같은 구근들이 고개를 내밀었어요. 낙엽 이불을 덮고 있는 튤립, 히아신스, 수선화, 알리움 등은 어떤 꽃으로 피어날까요. 포근한 봄날을 기다려보기로 했지요. 스산한 갈색 정원은 희망의 다른 이름 같았어요.      



"에키나시아가 피었네요!" 미술관 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은 진분홍꽃이 제 모습을 드러냈어요. 메말랐던 땅은 어느덧 수줍고 연한 봄의 정원을 지나 여름을 보여줘요. 무성함, 열기, 생명력,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바로 그 여름의 정원을요. "이번엔 비가 자주 내려서인지 작년보다 꽃이 많이 핀 것 같아요." 세미나실과 전시장을 오가는 직원들이 너나없이 반가워해요.   

  

한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여름날의 에키나시아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맹렬히 하늘로 향해요. 그늘로 피하는 법이 없어요. 텁텁한 공기에 자신을 맡기며 더위에 지친 직원들에게 여름을 대하는 법을 일러줍니다. 싫은 기색도,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에게 세상의 전부와 같은 한 계절. 그 순간에 홀로 있는 것처럼 찬란하게 삶을 피워내요.      


해를 향해 솟아올랐던 한 무더기 꽃들은 자신의 기운을 소진하고 금세 사위어가요. 여름이 머뭇거리는 사이 불에 그을린 듯 까맣게 변한 데드헤드는 초록의 향연 속에서 버티고 있던 대로 멈춰 있어요. "식물이 태어나 죽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의 아름다움을 포용하는 자연주의 정원" 안에서 이미 예견돼 있던 일들이 일어나고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봄 여름 그리고 가을. 햇살은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날, 바스라질 것 같은 검은 꽃들 사이로 한 송이 키작은 에키나시아가 철 모르고 피어났어요. 어떤 씨앗은 생장조건이 안 되면 몇 년이고 땅속에 웅크려 있기도 한다는데 이 늦된 녀석은 올해를 놓치고 싶지 않았나봐요. 어리숙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스러져가는 식물들과 한데 어우러져요. 자신의 속도로 순환을 시작합니다.      


이제 태어나는 것보다 시들어가는 게 더 많은 정원에서 자신의 생을 위해 일어선 꽃은 생명이 지닌 숭고함을 보여줘요. 스스로를 내보이고자 하는 그 힘. 피어났던 모든 것들이 아래로 꺼지듯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이곳엔 이르든 늦되든 어김없이 생명이 만발하게 되겠지요. 조용하고 당연한 과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어쩐지 그대로 편안해집니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또 어떤 것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시 겨울로, 천천히 흙으로 걸어가는 식물의 뒷모습을 보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가만히 답을 떠올려 봅니다. 모든 계절을 껴안는 정원 안에서 살아있음과 죽어감이 서로를 비추고 있어요. 거대한 자연의 흐름은 당신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까요?     





다섯 번째 정원문화 시리즈전시인 <The Sun is Going Home>에서는 정원에서의 죽음으로 삶을 읽어봅니다.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전시제목처럼 자연주의 정원의 순환원리 안에서 멀어지고 희미해져가는 현대사회의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나누는 이번 전시는 오는 12월 26일까지 이어집니다.      


<The Sun is Going Home>

전시일정 ㅣ2021.9.25 ~ 12.26

참여작가 ㅣ 여다함, 이대길, 이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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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식물이 태어나 죽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의 아름다움을 포용하는 자연주의 정원"은 <The Sun is Going Home> 전시서문에서 가져온 문장으로, 이는 피트 아우돌프와 헹크 헤릿선이 쓴 <Planting The Natural Garden>의 텍스트 부분을 의역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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