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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의 죽음으로 현대사회의 삶을 읽다

2021년 <The Sun is Going Home>전시에 관하여

이대길, 우리는 대지를, 2021, 아루미늄,모래,낙엽,나뭇가지,열매, 900x200x80cm(부분)


죽음이 산업화되고 있다. 인류의 노화는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나 죽음은 피하고 걷어내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죽음은 ‘의학화’되어 “죽음의 섬뜩한 광경, 냄새, 소리는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1] 환자와 노인은 요양시설로 보내져 사회안에서 “죽음은 상당히 오랫동안 감출 수있게” 되었고 죽음은 장례 대행 서비스에 의해 신속하고 깔끔히 처리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죽음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2]


죽음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은 현대의 문화가 해체, 부패, 불완전함을 부정하기 때문이다.[3] 일상은 영원한 젊음과 건강을 향해 있다. 이 전시는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정원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식물이 태어나 죽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의 아름다움을 포용하는 ‘자연주의 정원’의 담론을 통해 죽음을 오래 감추고 빠르게 처리하며 다시 삶을 소외시켜오는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대길, 우리는 대지를, 2021, 아루미늄,모래,낙엽,나뭇가지,열매, 900x200x80cm


싱싱한 식물과 움직이는 곤충과 같이 지상으로 드러난 것과 더불어 발 아래 흙에서 일어나는 일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정원사로서 이대길은 현대사회가 흙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음이 죽음에 대한 격리로 이어짐을 말한다. 자연안에서 죽음과 삶은 순환의 한 고리안에 있고 흙은 그 시작과 끝의 모든 면모를 안고 있다. 평생 포장재를 밝고 살아가는 도시환경에서 흙의 부재는 마치 낙엽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깨끗이 치워지듯 죽음으로부터 포장하고 외면한 우리의 삶을 목격하게 한다. 


이대길, 바벨탑, 2021, 폐조화,금속구조물, 50x50x300cm


정원일에서 늘 진짜 살아있고 진짜 죽는 것들과 마주해 온 이대길 정원사는 오직 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으로 죽지 못하는 식물로 태어난 폐조화를 살아있는 정원 안에 수직적으로 세워놓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그라지지도 고꾸라지지도 못하는 존재는 생명이 있는 것들이 가진 시들 권리를 박탈당한 듯 보인다. 그의 <바벨탑>은 눕지 못하고 영원히 대지 위에 꼿꼿이 서있어야만 할 것 같은 현대의 인간상을 닮아 있다.


여다함, 내일 부서지는 무덤, 2021, 이불(코튼에 향을 태운 패턴), 가변크기


기념비적인 생을 헛되이 추앙하는 <바벨탑>과 대조적으로 이불을 소재로 한 여다함의 <내일 부서지는 무덤>은 대지처럼 수평적이다. 여다함에게 이불은 ‘잠든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나 대신 기억하고 있는 존재’이다. 의식은 잠이 들고 알 수 없는 몸의 뒤척임만 남는 잠의 시간이 그에게는 죽음을 ‘연습’하는 시간으로 여겨졌다. 미리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매일 경험하며 남은 흔적으로서 죽음을 더듬어갈 때 그 형태는 이불처럼 붙잡을 귀퉁이가 있는 유연한 덩어리와 같은 것일까 아니면 순식간에 걷어 차버릴 수 있는 홑겹의 면에 가까운 것인가. 매일 삶의 한면으로 붙어있는 죽음의 일상성을 논하며 그의 다른 작품 <향연>은 죽음의 존재형태는 연기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말한다.


여다함,향연, 2021, 향, 연기, 조명, 450x25x30cm


향에 불을 붙이면 연기와 냄새를 피우며 재가 되어가는데 이 둘은 크기와 고정된 모양새가 없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한번에 걷어낼 수 없다. 죽음은 향처럼 나를 촘촘이 둘러싸고 있는 것일까. 네모난 거울을 들고 산과 들판, 물가를 헤매는 퍼포머가 등장하는 <경>에서 죽음은 삶이 지배하는 현실공간의 틈처럼 느껴진다. 겹, 틈, 그물 같은 둘러쌈, 덩어리 등 그의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죽음은 붙잡을 수 있는 형태를 짐작하게 하는 삶의 범주안에 들어와 있다.


경, 2019, 1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7분


반려동물의 죽음을 기록한 이솝의 작업에서 죽음은 더욱 물질적인 것이 된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반려견을 안락사 시키지 않고 자연사를 선택한 작가는 늙은 반려견이 치매를 앓고 몸이 스러져가며 생기는 모든 형태, 냄새, 촉각과 눈빛의 변화를 일기를 쓰듯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살아있는 신체가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을 기다려주고 카메라의 눈을 통해 드러내고 언어로 돌보듯 상황과 느낌을 놓치지 않고 쌓아 놓는 행위에서 죽음은 삶에서 갑자기 도려내어지듯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회복한다. 


이솝, 2001-2020.5.22, 2020, 사진, 520x15cm(부분)


“죽음이 돌보아지지 않으면 죽어가는 인간도 돌보아지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장례를 해치우듯 하는 현대사회에서 생에서 사로 이어진 존재에 대한 애도의 시간까지 길게 품어낸 그의 작업은 죽음에 관한 추상적인 논의를 물질의 차원과 순환의 과정으로 끌어내리며 삶과 같은 범주안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정성을 들이는 삶처럼 죽음을 대하게 한다.[4]


이솝, 꿈속에서, 2021, 패브릭, 나무, 31.2x139x75cm

죽음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바꿀 필요가 있다. 좋은 삶을 위해 육체적, 정서적 과정으로서 죽음이 ‘알려져야’ 하고, ‘돌보아져야’ 한다 말한다. 창조도 파괴도 끊임없는 순환속에서 행하는 자연의 거대한 작업에 연결되어 있는 정원과 정원일안에서 자기자신을 자연과 분리해 왔듯 죽음을 삶에서 부정하고 떼어놓는 현대의 문화를 돌아보고자 하였다. 


‘한창 살아가는 중에도 우리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Media Vita in Morte Sumus).’ 생명과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정원사와 예술가의 눈을 통해 인간조건으로서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나누고자 한다. 해는 ‘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의 순환원리에서 그 일부인 인간의 죽음을 다시 읽어봐야 한다.





[1]

1930년대 죽음의 ‘의학화’라고 알려진 현상이 일어났다. 병원이 점점 많아지면서 죽음의 섬뜩한 광경, 냄새, 소리는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죽어가는 과정은 병원에서 엄격하게 위생적으로 관리되었다..병원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산자들의 감성을 건드리지 않고서도 죽음의 점잖지 못한 점들을 감내할수 있는 장소였다. 케이틀린 도티, 임희근 옮김,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서울: 반비, 2020), p. 80-81

[2]

장례는 ‘해치우면서’ ‘치워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장례를 해치우는 일은 죽은 사람을 바쁜 도시의 삶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무의식이 되어 버린다. 인간성이 없는 축소된 장례식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의 시간을 소모하지도 않고 정신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통곡도 죽음에 대한 사유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최은주, 『죽음, 지속의 사라짐』 (서울:은행나무, 2014), p.71-72

[3]

“홀로 내버려두면 인체는 썩고 부패하고 분해되어 영광스럽게 원래 나왔던 흙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막기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무거운 보호용 관을 사용하는 관습은 불가피한 것을 모면해보려는 필사적 시도이며 우리가 명백하게 해체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산업은 관과 시체가 ‘자연스러워’보이는데 도움을 준다는 명목하에 방부처리를 광고하지만, 미국의 현재 죽음 관습은 곰과 코끼리 같은 커다란 동물들에게 작고 귀여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건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케이틀린 도티, 앞의 책(2020), p.228

[4]

최은주, 앞의 책(2014),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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