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가 많아 꽤 오래 신이 나야 무엇이든 결국 전시로 만들 수 있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정원은 내게 새로운 책을 찾게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처음 정원이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확실해진 것은 <정원을 말하다>책의 네번째 챕터 ‘집 없는 이들의 정원’을 읽고 나서였다.
저자는 뉴욕의 홈리스들이 버려진 장난감과 봉제 동물인형, 깃발, 재활용 쓰레기, 나뭇잎 뭉치 등으로 만든 정원들을 기록해온 다이애나 발모리Diana Balmori와 매거릿 머튼 Margaret Morton의 1993년 사진집 <일시적인 정원, 뿌리 뽑힌 삶Transitory Gardens, Uprooted Lives>을 언급한다. 집이 없는 이들이, 흙과 식물이 없는 이들이 만든 정원이 ‘정원’인 것은 그것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울타리를 치되 단단한 벽은 없는 공간. 경계를 만들되 소리와 시선은 넘나들 수 있는 개방된 장소. 정원은 구분된 공간에서 휴식을 찾는 동시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며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인간적 욕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원은 땅에 뿌리박지 않은 이들에게 잠시 불쑥 생겨났다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정원은 땅과 식물을 의미의 중심에 놓기 보다 특정 공간에 대한 경험을 원하는 인간적 욕망으로 일으켜 세워지기도 한다. 주변의 모든 것에서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찾아지는 것만 같던 때 비행기안에서도 정원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에 손이 갔다. 주로 유럽의 오래된 정원 풍경이 흐르다가 성인 남자였던 내레이터가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은 초록 담벼락 사이로 걸어가며 하는 말에 눈이 뜨였다. 근대 이전 정원에서 사람들은 마치 뉴욕의 마천루사이를 걷는 것처럼 새로운 공간경험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키가 큰 식물다발을 균일한 면으로, 위로 뻗은 사각의 직선으로 다듬어 올려 비일상적인 거리감, 시야, 공기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정원을 거닐었다는 말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필터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이 없는 각진 모양의 렌즈와 같은 시각이지만 이런 안경을 쓴 이에게 정원은 마치 납작한 캔버스에 원근법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그런 경험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것에 딸려 있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세계는 부차적인 것이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있기 전, 또는 그 이후에도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들 중 누군가에게 정원은 반쯤 닫힌 동시에 반쯤 열린 경계이자, 광대한 하늘을 끌어오고 지구의 지면이 받쳐주고 있는 것 같은 색다른 ‘공간’에 대한 경험으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원에는 문화라는 단어가 붙게 된다. 정원을 말하기 위해서는 ‘왜’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흙과 식물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하는 이가, 그러나 인간에 대한 무한대의 질문을 던지는 예술의 영역에 있던 이가 정원에 관한 전시를 만들 수 있겠다 생각했던 이유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때마침 확신의 못질을 더해준 행사가 열렸다.
<정원을 말하다>책의 역자 중 한 분이시고 조경학과 교수님으로 서울식물원의 기획을 총괄하고 계신 분이 초청해주신 국제심포지움이었다. 2016년 겨울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드는 자리에 미술관 직원 두 명이 받아 든 심포지움 책자의 제목이 ‘식물, 문화가 되다’였다. 우리가 있을 수 있는 자리이구나 싶었다. 아직 지반을 다지고 있던 서울식물원의 미래를 그리는 논의의 중심에 “식물원은 인간성을 키우는 장소”라는 Stirton의 인용문이 창을 열어주는 것 같았고 서울식물원은 정원문화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는 논제가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서울시의 마지막 미개발지였던 마곡지구에 들어설 이 새로운 공간이 품고자 했던 이야기에 나도 몹시 설레었고 이와는 다른 곳에서 다른 색과 형태이지만 정원문화라는 나누고픈 이야기가 선명하게 떠올라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