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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학자와 원예학자의 방

꽤 두꺼운 책이었다. 보통 침대에 반쯤 누워 책을 읽는 나는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는 책 모서리를 접어가며 읽는데 [정원을 말하다] 이 책은 연필을 찾고 밑줄을 치고 모서리도 접고 페이지를 반으로 접기까지 하며 읽어갔다. 저자인 로버트 포그 해리슨의 글이 시작되기 전 옮긴이의 글에서부터 먹어야 할 내용들이 눈을 붙들었다.

 


자연을 다루는 일이기에 평화로움을 연상하는 정원사의 모습에 염려와 걱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정원사는 일년 내내 한결 같이, 심지어 “날씨까지도 경작하며” 정원을 돌보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정원을 걱정해야 하는 운명이다.’ 돌봄(care)이라는 마음과 몸의 행위 때문에 정원일이 인간 본성에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는 말은 너무나 의외였다. 무언가를 얻고 가지기 위해 하게 되는 것에 익숙한 논리의 사회에서 그 반대를 위해 시간을 내어 몸까지 움직인다니. 


이 내용부터 지적자극이 충분했다. 정원이란 예쁜 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순간보다도 흙을 일구고 비가 올지 안 올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매일 흙과 식물을 돌보는 일이 그 즐거움의 핵심이라는 말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붙들었다. 정원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세계를 포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슬쩍 보고 하나의 전시로 스케치하고 말 주제가 아니구나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느꼈다. 



이때 미대생으로 농대를 자주 오가던 미술관 팀장이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소를 전공한 그녀는 대학 시절 산림자원학과와 원예학과 수업을 들으며 졸업 후 플로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통화 후 원예학과 교수님께 데려가 주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 교수님께서 조경학과 교수님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 분이 [정원을 말하다]의 역자 중 한 분이셨다. 


이것은 운명인가 보다 하며 연락을 드리고 원예학과 교수님을 먼저 찾아 뵈었다. 한번도 드나든적 없는 농대 건물로 들어가 실험실들을 힐끗거리다 교수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부터 곳곳에, 책상 위 그리고 앉아서 얘기하시는 의자 바로 옆까지 화분들이 가득했다. 손으로 화분을 쓰다듬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고 정원과 문화로 이어지는 일들을 하고 계신 업계의 다양한 분들을 소개해 주셨다.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환경대학원에 계신 조경학과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강의실들을 지나 교수님 방에 들어서니 한쪽 벽면 전체의 긴 책장에 정원관련한 책들이 빼곡했다. 당장 뽑아 살펴보고 싶은 책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색되지 않던 외국서적들 얘기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고 미술관에서 다시 뵙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방을 나왔다. 


손과 무릎이 닿는 곳까지 화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원예학자의 방과 매력적인 제목의 책등을 살피느라 걸음을 떼기 어려웠던 조경학자의 방에서 다른 공기가 느껴졌던 것이 기억에 선명하다. 정원이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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