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지나간다
오랜만에 진탕 술을 마셨다. 그 시작은 과메기였다. 다른 모임에서 과메기 먹은 이야기가 나왔고, 이때 아니면 못 먹는다는 핑계로 우리도 약속을 잡았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 굳이 명목을 붙여 모임을 만들어 낸다. 안 될 이유를 말하는 이 없다. 각자 이런저런 일정으로 바쁘지만,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만들어 낸다. 빠지면 손해란 걸 모두 알기 때문이다.
쏘맥 두어 잔으로도 즐길 줄 아는 우리에게 소주 4병에 맥주 3병은 '진탕'이 틀림없다. 모두 적당히 기분 낼 정도의 주량인데 '신년회'라는 명목하에 들떴다. 예상보다 훨씬 푸짐하고 이쁘게 차려 나온 과메기 탓도 크다. 이 좋은 안주에 점잖게 술을 마신다는 건 주도(酒道)가 아니다. 소주와 맥주를 적절히 섞어 단숨에 넘기기 좋은 비율로 제조한다. 첫 잔에 대한 예의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됐다. 기대가 흥분이 되는 건 순간이다. 흥분이 노래가 되는 건 즐길 줄 아는 자의 몫이다. "오빠, 첫 잔은 원샷이겠죠?"를 각자의 버전으로 불러보며 갈증에 기대를 더한다.
안주가 예술이다. 사장님의 솜씨는 예술과 과학의 집합체다. 맛보지 않아도 이미 합격이다. 반지르르한 과메기는 정성스레 찢어 봉긋하게 담아내셨다. 기름진 녀석의 전생과 후생을 바라본다. 동그란 접시에 샛노란 배추가 받침이 되어준다. 초록 해초와 생미역, 쪽파와 미나리, 치커리와 대파의 하얀 껍질, 그 위에 무심히 던져놓은 마늘과 고추가 상거래의 모양이 아니라 집에서 차린 듯한 정성이다. 대파의 하얀 껍질 몇 개를 한가운데 꽂아 놓은 게 화룡점정이다. 꽃의 수술처럼 접시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음식을 예술로 피워내는 솜씨다. 먹기도 전에 눈으로 색의 조합을 먹는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단 말을 증명한다.
노랑 배춧속을 먼저 손바닥에 올리고 돌김 한 장을 올린다. 생미역과 해초, 미나리와 쪽파까지 올리고 마늘과 고추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초고추장 찍은 과메기 두어 점을 올려 감싼다. 왼손엔 안주를 오른손엔 술잔을 든다. 신년 덕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맛에 대한 기대만 남았다. 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욕인 듯 오직 이 순간만 욕망한다. 입안이 꽉 찬다. 배추가 터지고 고소한 살이 씹힌다. 미나리와 마늘이 합심한 덕에 느끼함은 느낄 겨를이 없다. 마지막까지 맴도는 김이 입안을 청소한다. 술이 술술 넘어간다. 오랜만에 음식에 감탄한다. 사장님께 감동이다. 구룡포 앞바다가 넘실댄다.
5시에 시작된 우리의 모임은 6시도 되기 전에 절정에 이른다. 직장인들 퇴근 전이라 손님은 우리가 전부다. 사장님의 허락 따윈 구하지도 않고 웃음과 권주로 데시벨이 높아진다. 술을 아끼는 이에겐 손가락 접기 게임으로 골탕을 먹인다. '책 낸 사람 접어, 동시 상 받은 사람 접어, 핑크 티셔츠 접어, 교정한 사람 접어, 주택 사는 사람 접어' 하며 한 사람 골탕 먹이는 건 일도 아니다. 돌아가며 한 사람씩 타깃을 만들어 재미를 더한다. 얄궂은 공격마저 싫지 않다.
쉬지 않고 오가는 술잔에 머리가 핑 돈다. 순간, 철없던 시절 부렸던 주사(酒邪)가 생각난다. 오늘이 그날이 될 건 아닌지 걱정이다. 작년 한 해는 이 술잔마저 주의를 기울이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을 염려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허리띠를 풀어놓은 듯 오랜만에 진탕 속으로 빠진다.
직장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소리를 낮춘다. 술기운이 돌아 낮춘 게 낮춰진 건지 알 수 없다만 주위를 의식한다. 드디어 이야기가 시작된다.
웃음이 전초전이었다면 본론은 슬픔이다. 다섯 여자가 쏟아놓는 각본 없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민낯까지 다 봐 온 이들이라 숨길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다. 가정마다 돈으로 겪은 고초의 시절은 단골 메뉴다. 출산과 동시에 시작된 남편의 사업 실패, 반대의 경우로 인한 남편의 헛바람, 실직으로 인한 고통, 가족의 빚을 떠안은 원망의 세월, 홀로 귀농을 선택한 남편 등 순탄하기만 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들을 자랑처럼 꺼내 볼 수 있는 건 오늘의 평안 덕분이다. 여전히 부자는 아니지만 소주 한잔하기에 무리 없는 정도의 여유는 가지게 됐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고통 다음에 안도의 한숨과 여유가 찾아왔다.
그 세월이 없었더라면, 고통에 대한 교집합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진득한 애정을 쏟아내지 않았을 모임이다. 시작부터 무탈하게만 살아온 이들은 멋이 없다. 그들은 모르는 인생의 맛이 있다. 암만 지식이 높고 유려해도 애증의 인간미를 느낄 수 없다. 얼음골 찬 서리를 이겨낸 사과여야만 낼 수 있는 깊은 맛이 있다. 잘라보기 전엔 알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로 격리병동에 수용된다면 나는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갇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죽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가두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갇혀 있다고 느낀 시간이 있었다. 번듯하게 출입문이 있지만 나만 출입할 수 없는 문이 있었다. 돼지국밥집을 하며 보낸 세월은 갇혀 있던 시절이었다. 서른 평 남짓한 가게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 종일 입 밖에 내는 말은 메뉴를 묻는 일과 그들에게 나누는 인사가 전부였다. 어쩌다 수다 떨 시간이 왔을 때 생각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와 나에게 동시에 갇혀 있던 시절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시간 동안 알맹이는 다 파 먹히고 껍질만 남은 듯했다. 노동보다 힘든 건 네모난 틀이었다.
얼마나 됐다고, 툴툴거렸던 그 시간을 자랑하듯 떠벌리고 있는 내 소갈머리를 본다. 영광의 상처처럼 그날들을 되돌려 보는 날이 많아졌다. 반전이란 단어를 써 가면서 까불고 있다. 고진감래라는 말을 자화자찬처럼 떠올리며 겸손을 잃어간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었기에 소유도 소비도 내 몫이라 위로한다. 온전히 내가 참아내 온 길이었기에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는 나의 고통, 나의 자만이다. 그 고개를 넘어왔다. 생각보다 무사히 살아남았다.
나는 이제 안다. 행여 다시 그 같은 시간이 또 오더라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곧 지나간다는 걸. 지나고 보면 아무런 의미 없이, 이유 없이 오는 건 없다는 걸. 저 문밖에 환희가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겁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시간에게 내가 배운 인생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