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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an 24. 2023

짜장에 빠지다

외숙모가 해 주신 짜장




- 우리는 그것을 스테이크라고 '믿고' 먹었다. 한편 요리사와 우리 가족은 서로 얼마나 안도했을까?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 '종이 물고기'를 읽었다. 무턱대고 찾아간 소설 반에서 두 번째 수업을 듣고 드디어 현타를 맞았다. 소설을 쓰러 가서야, 소설을 잘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무모함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턱대고 출항한 처녀항해의 자초 같다. 카톡에 남긴 '현타'를 보고 선생님께서 단편 소설을 읽어보길 추천해 주셨다.


문장과 단상에 감탄하며 읽었다. 선생님 말씀처럼 어떻게 설계했는지를 염두에 두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시험 전날에야 불 떨어진 수험생 같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똥고개'에 사는 가난한 가정의 이야기다. 6살이 되자 엄마 아빠는 일하러 나가고 그는 개다리소반과 옷장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가 자라 대학 졸업을 하던 날, 가족은 처음으로 스테이크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주문한 지 한 시간이 지나도 요리가 나오지 않자 아버지는 '확실히 비싼 음식이라 오래 걸리나 보다.'라고 하시며 처음 만날 요리를 느긋하게 기다려 주신다. 그러나 한참 후에 테이블에 나온 음식은 스테이크가 아니라 햄 볶음밥이었다. 뭔가 의아했지만, 한 번도 스테이크를 본 적 없는 그들은 그것이 스테이크라 믿고 먹었다. 사실은 가족은 물론, 요리사도 스테이크를 몰랐던 것이다.


나에게 '짜장'이 그런 요리였다.

시커먼 짜장이 동그란 양은 밥상 위에 올려졌을 때 나는 그것이 짜장인 줄 몰랐다. 외종사촌 오빠들은 익숙한 듯 그것을 밥 위에 올려 하얀 밥을 까맣게 칠했다. 아래로 흘러내리고 난 짜장 봉우리엔 당근과 숭덩숭덩 썬 고깃덩어리들이 있었다. 가난한 그들이 처음 만난 스테이크처럼, 산골에서 온 나에게 초록도 빨강도 아닌 이런 색깔의 음식은 처음이었다. 나는 묻지 않았고 설명하는 이도 없었다. 오빠들은 내 낯섦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 명 중 가장 여성스러운 가운데 오빠가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까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먹는 법을 설명해 주는 대신 우리처럼 먹으라는 친절이었다.


외숙모도 처음엔 우리 마을에 살았다고 했다. 아들 둘이 태어났고 복중에 막내를 가지고 있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시어머님 돌아가신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까지 잃었다. 노비를 몇 명이나 부리고 살던 외갓집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재산이 빠져나가는 것도 몰락이지만, 줄초상을 치는 것도 몰락이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슬픔에 며느리의 슬픔을 대입했다. 아들 떠난 그 작은 가정에 젊은 책임감이 돋아났다. 외숙모는 당신의 푸른 청춘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 생명과 이제 막 총총거리는 두 아들의 인생은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암담했다. 불쌍한 듯, 안쓰러운 듯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당신과 며느리가 받는 눈총이 남사스러웠다. 마을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함양으로 터전을 옮긴 것은 외할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외숙모의 숙명이었다. 남사스러운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젊은 며느리를 가엾단 이유로 접근하는 뚜쟁이들을 피해 간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술 마시는 남편과 산 짧은 세월이 고통과 희망의 시소였다면, 시아버지와 농사지으며 사는 것은 고단한 가운데 든든함이었다. 어린 손자 셋과 가녀린 부인을 감싸주는 기골장대한 시아버지셨다.

오십이 된 내 기억에 아직도 필름처럼 남은 장면이 있다. 방학이면 으레 외숙모집에 가 며칠을 놀다 왔다. 그날은 멀리 있는 논에 가시며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어린 나는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논에 지겹고 지쳤다. 우리 마을과 비교할 수 없는 벌판이었고 평야였다. 외할아버지는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녀린 외숙모는 뒤에서 리어카를 밀었다. 리어카에 담긴 내용물은 기억나지 않고 가슴을 죄는 리어카 손잡이를 움켜잡은 외할아버지와 뒤에서 고개를 떨군 채, 마치 그것을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밀던 외숙모의 모습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고단함이 밀레의 화폭에 묻은 듯 선연하다.


주부의 삶은 외숙모에게 사치였다. 일찍 떠난 남편을 원망해 봐야 소용없었다. 빠른 적응만이 삶의 방정식이었다. 시아버지와 농사를 짓고도 모자라 주부로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들어 팔았다. 찐빵을 쪄서 팔았고 떡을 쪄서 팔았다. 고구마와 옥수수는 물론이고 수확 끝난 남의 집 과수원에서 과일을 주워다 팔았다. 고정 수익 없는 가정에 세 아들은 고정되지 않고 자랐다. 먹을 것은 더 많이 필요해졌고 외숙모의 속은 정확히 반비례해서 타들어 갔다. 밥 굶기지 않으려고 질보다 양을 늘렸다. 그중의 하나가 짜장이었다.

기름 두른 팬에 양파 달달 볶아 노릇한 색을 만든다. 양파가 낸 고소함이 냄비는 물론 집안에 퍼진다. 그 기름에 돼지고기 앞다릿살 숭덩숭덩 썰어 넣어 볶는다. 잠시 잠깐 부잣집 냄새가 머물다 간다. 당근 세 개를 뚝뚝 썰어 넣어 커다란 냄비 가득 채워 볶다가, 춘장을 넣고 한 번 더 볶는다. 물을 넣어 뭉근히 끓여 재료가 다 익었다 싶을 때 풀어놓은 녹말을 넣어 묽기를 조절하면 끝이다. 농도가 곧 간이다.


아들 많은 집에 바쁜 엄마였다. 짜장 한 냄비면 일일이 내 손이 닿지 않아도 세 아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식사였다. 오빠들은 엄마가 없어도 익숙하게 짜장을 퍼 와서 비벼 먹으며 자랐다. 밥 위에 올리면 짜장밥이, 면 위에 올리면 짜장면이 되었다. 오빠들은 그 밥을 먹고 대기업 이사님이 되었고, 고깃집 사장님이, 건어물집 사장님이 되었다.

불쑥불쑥 외숙모의 짜장이 생각난다. 전화를 걸면 그 맛을 느낄세라 그리움을 더듬는다. 외숙모는 마치 엄마랑 나눠 갖기로 약속이라도 하신 듯 "아고 우리 딸이가~?" 하며 내 목소리를 반겨주신다.

사십 년이나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음식이자 추억이다. 내게 스테이크 같은 요리다. 누구보다 힘든 청춘을 보내고 늙음에 당도했지만, 봄날의 목련처럼 우아하시기만 하다. 잘 키운 아들들이 호위무사처럼 지켜주시니 든든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외숙모의 숭고한 삶이 짜장과 함께 범벅되는 건 무례해 보이지만 내겐 뗄 수 없는 조합이다. 깊은 냄비에 푹 빠져있는 기다란 국자 한가득 짜장을 떠서 슥슥 비벼 먹고 싶은 날이다. 그 속에 든 외숙모의 헌신과 사랑, 인내의 건더기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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