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삼고초려와 적벽대전이다. 조조가 위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사이에도 유비는 오랫동안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군만마 서서가 있었다. 그는 깊은 산 중에 있는 제갈량을 모셔 올 것을 권한다.
도원결의를 맺은 유비, 장비, 관우는 제갈량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가지만, 동자가 나와 이미 집을 나갔다고 알려준다. 늦도록 기다렸으나 그날은 만나지 못했다. 두 번째,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갔으나 그새 또 친구들과 유랑을 떠나고 없었다. 유비뿐만 아니라 독자의 애간장도 녹이는 장면이다. 세 번째 방문길에 올랐을 때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서 찾아간다. 천우신조를 바라는 유비의 간절함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동생들을 멀찍이서 기다리게 하고 찾아가 보니 제갈량은 낮잠 중이었다. 그는 마당 가운데 다소곳이 서 제갈량이 깨기를 기다린다. 그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이 결국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가 되는 유명한 삼고초려 일화다. 그의 지략으로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대승하는 장면은 삼국지 10권 중 최고의 명장면이다.
지난달,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을 관람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1,448점의 미술품을 국공립 기관에 기증했다고 했다. 그 숨을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예술 문화계에 의미 있는 기증이라 생각한다. 미술품에 문외한이지만 가까이에서 한국 문화사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게다가 무료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이용우 화가의 <삼고초려>가 떡하니 걸려 있었다. 서울에서 본 '합스부르크' 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좁은 통로에서 시작되는 서울 전시였다면, 이번 전시는 확 트인 입구로 시작됐다. 맞이하는 그림으로 내 건 그림이 <삼고초려>였다.
얌전하지만 꼿꼿한 선비 같은 그림이다. 화려해서 이목을 받는 그림은 아니지만 내 발걸음을 붙잡기엔 충분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 그림을 시그니처로 건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술품의 가치는 모르더라도 좀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 중심엔 의복을 갖춰 입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유비가 있다. 그 곁엔 마치 설명이라도 하는 듯 동자가 손가락질하고 있고 그 손끝을 따라가면 책을 괴고 낮잠에 빠진 제갈량이 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유유자적한 그의 태도는 유비와 대비된다. 잠든 제갈량이 깨기를 기다리는 유비의 갸륵함이 깃들어 있다. 사모관에 달린 빨강 장식이 큰 그림에 재미를 더해 준다.
작가의 이야기에 화가의 상상력이 더한다. 유비와 두 동생 사이엔 사립문이 있고 사립문 안쪽에 새하얀 학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이 유비와 다르지 않다. 공명의 마음을 얻을 수 있길 바라는 듯 얌전한 모습이라 방해되지 않는다. 성질 급한 장비의 내리깐 눈빛이 금방이라도 제갈량의 멱살을 잡으러 뛰어들 듯하다. 유비의 신신당부에 억누르는 마음을 장팔사모 대신 조그마한 칼자루로 그려냈다. 대춧빛이라던 관우의 얼굴빛도 장비완 다른 빛으로 표현했다. 두 동생의 격분과 유비의 여유가 대비된다.
또한 초려라고 하지만 제갈량의 집에선 학자의 기품이 엿보인다. 괴고 있는 두꺼운 책이며 화분과 마당의 분재와 소나무가 그의 기개와 정서를 말해주는 듯하다. 아예 드러눕지 않고 책상에서 낮잠 중인 건 본격적으로 잘 의사가 없었음을 드러낸다. 학자의 단잠이다.
네 인물을 대각선으로 배치했으면서도 원근법에 어긋나는 인물의 크기도 인상적이다. 제일 가까이 있는 장비보다 제일 멀리 있는 제갈량을 더 크게 그린 건 주인공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개울 건너 멀찍이 매어 놓은 말 세 필도 유비의 조심성을 대변하는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다시 느꼈다. 갑자기 어디선가 소음이 들린다. 마룻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도 관람에 방해가 되었다. 저만치 가서야 웅성거림이 도슨트의 설명이란 걸 알았다. 얼른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가 보니, 삼고초려에 대한 설명이 한창이었다. 미처 듣지 못한 앞부분을 유추해 보니, 이 그림을 삼성이 소장하게 된 것은 '인재 채용'에 깊은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훌륭한 인재를 얻기 위한 삼성의 의지와 노력이 그림에 부합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이 1950년에 그려진 작품이라니 더 놀랍다.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예술을 붙잡은 그들의 영혼이 오늘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1938년생인 아빠는 1958년도에 결혼했다. 1968년도에는 향토 예비군 소대장을 맡아 5년 동안 일했다. 연이어 1973년엔 마을 이장을 맡았고 때마침 일기 시작한 새마을 운동으로 농사 일하면서 마을을 일으켜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교량 공사, 길 확장, 담장 보수, 지붕 개량, 마을 창고 건립, 상수도 공사, 하천 정비, 농로 개설 등 수없는 새마을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 집이 헐리고 집터가 편입되어야 해 설득과 노력, 이해와 협조가 필요했다고 하니, 아빠가 겪었을 어려움이 훤히 그려진다. 그 덕택에 우리 마을이 10개 면 중에서 최우수 마을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빠의 열성이 얼마만 했을지 훤히 짐작된다.
한창 바쁠 그즈음에 내가 태어났으니, 다섯 자식의 교육 문제며 농사, 마을 일을 동시에 보는 것이 벅찼을 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3년 만에 사의를 표했으나 마을 주민들이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의 거절이 그들보다 더 완강했다. 아빠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아빠와 동갑인 분을 후임자로 선출해 1년 만이라도 맡아 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드디어 홀가분해진 아빠는 그날 밤 모처럼 발을 뻗고 주무셨다. 그러나 날이 새기 바쁘게 그분이 다시 찾아와 도저히 자신이 없다며 수락을 번복했다. 당황한 아빠는 여기 있다간 또 일을 맡겠다 싶어 그길로 집을 떠나 함양 외갓집으로 부산 친구 집으로 유랑을 떠났다고 하신다. 며칠을 밖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친구분은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삼고초려에서 아빠를 만났다. 언젠가 이상범 화가의 수묵화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처럼 마음이 머물렀다.
다소곳한 유비가 제갈량 만나기를 읍소했다면 아빠는 오히려 제갈량처럼 자리를 떠나있어야 했다. 유비 같은 아빠가 작은 몸과 여린 마음으로 제갈량 같은 큰일을 어떻게 다 해내셨을지 궁금하고 안쓰럽다. 아빠의 전성기가 지금 우리 마을의 형태를 갖춘 시기와 맞먹을 거라 생각하니 사진 속 청춘의 기백과 늙은 초로가 오버랩된다. 청춘이 마치 남의 물건처럼 잠시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유비의 제갈량 채용이 유비와 손권에게 적중했듯 우리 마을의 성장 가도에 아빠의 등용도 으뜸가는 선택이었을 테다. 당신 삶의 회고에 빠질 수 없는 사건이자 청춘의 대변, 그로 인해 더 힘들었을 엄마의 청춘과도 맞닿은 시절이었다.
삼국지를 읽고 <삼고초려>를 만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한 그룹의 회장이 떠나고서야 입게 된 수혜다. 어쩌면 이 마을도 기력 다한 아빠가 지키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떠난 후에 더 빛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 아니라 아빠가 우리에게 들인 궂은 희생과 사랑도,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더 감사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빈자리에 핀 꽃을 보며 뒤늦은 뜨거움을 삼킬 것만 같다. 후회는, 늘 걸음이 느리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