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이 내게 왔다.
1년 비정규직 일자리를 마친 딸아이가 두 달 남짓 놀다가 직업 전문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엄마'를 찾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3종 세트를 매일 읊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잠도 식사도 운동도 좀처럼 예외를 두지 않는 규칙적인 딸에게, 때맞춰 식사를 챙겨주고 비위 맞춰주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동시집 준비와 각종 강의 준비로 나는 바빴고 딸은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을 나는 침범 당했다고 생각했고 딸은 놀아주지 않는다고 투정했다.
아침 8시, 남편에 이어 딸아이가 나가고 집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부지런한 '오징어젓갈' 아주머니와 '고장 난 트레비' 장수가 이 마을을 한바탕 휩쓸고 가고 뒷집 영훈이 할머니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오지만,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소리다. 소음에서 벗어난 건설 노동자처럼 해방이다.
글을 써도 되는 덩어리 시간이 다시 생겼다. 새벽부터 글을 쓴 벗들의 글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출근 전 한 편을 발행하기 위해 몰입했을 벗들을 느낀다. 칭찬과 지적의 댓글을 드리지만 실은 칭찬만 받아도 마땅한 분들이다. 어느새 내 삶 깊숙이 와 있는 그녀들. 사는 곳도 생각하는 것도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내가 곧 글이라, 글이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이에게선 활기를 어떤 이에게선 고요를 느낀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재미난 게임이다. 나 역시 동시를 쓰기 시작하고 고스란히 드러나는 철학과 가치관이 부끄러워 잠시 주춤했지만, 페달을 굴리며 실패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멈춘다고 딱히 뾰족한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주눅 든 경험이 없는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기도 했다.
벗들의 글을 읽고 내 글을 마저 마무리한다. 새벽에 이어지는 고요한 2부다. 방해받지 않는 '홀로움'을 즐긴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내야 할 감사한 시간이다.
오랜만에 청소기를 꺼낸다. 별스럽지 않은 일이 특별한 일이 되었다. 청소하지 않아도 까탈스럽게 구는 이 없으니 감사하다. 비염이나 알레르기를 호소하는 이도 없으니 모두가 조력자다. 먼지 통에 가득 찬 건 게으름과 핑계다. 잠시 잠깐만 시간 내면 되는 일에 소홀했다. 마음먹은 김에 유리세정제 통도 꺼낸다. 내용물이 비어 있은 지 오래됐다. 살뜰한 이가 알려준 대로 다 쓴 치약을 잘게 잘라서 통에 넣는다. 뽀독하게 닦이는 건 치아뿐만 아니라 하니 속는 셈 치고 따라 해 본다. 가위질 몇 번 해서 넣고 물을 넣어 흔든다. 거품이 인다. 주방과 식탁, 거실 테이블과 화장실 거울 등에 분사해 놓고 역순으로 차례차례 닦아낸다. 습도처럼 끈적거리던 것들이 해맑아진다. 비싼 세정제가 필요 없다. 지혜는 죽을 때까지 배워도 끝이 없다더니, 쓸모를 다한 물건의 쓸모를 재발견한다.
청소가 끝나자 마침 빨래도 끝났다. 햇살이 좋으니 건조기 대신 마당에 건조대를 펼친다. 햇살도 장단점이 있어 빨래엔 이로우나 얇은 피부엔 가혹하다. 기미와 검버섯이 남의 입에 오르내릴 지경이됐다. 창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다. 빨래를 널 때면 맨 먼저 아빠 옷부터 널라던 엄마 말이 생각난다. 아빠를 지아비가 아니라 막내아들처럼 함부로 대하면서도 빨래에 서열을 따지는 엄마다.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아들 옷 속에서 남편의 옷을 찾는다. 티셔츠 하나가 있다. 그래, 엄마처럼 그의 옷부터 넌다.
담 없는 집은 온 동네를 향해 열려 있어 자연스레 이 동네 눈요깃거리다. 작년에 막 이사 왔을 땐 카페로 착각하는 이도 있었다. 화분 수십 개가 나와 있고 꽃이 피고 진다. 잔디를 깐 마당엔 작은 테이블도 놓았다. 실내는 13평 주공 아파트처럼 형편없지만, 겉보기엔 근사하다. 속 모르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을 만하다.
근처 어린이집 선생님이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둘씩 둘씩 손잡고 선생님이 가운데서 두 손을 연결하고 있다. 아마도 선생님 손을 잡은 아이는 제일 어리거나 제일 개구쟁이일 테다. 반대로 손잡지 못한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나름 모범생이어서 알아서 잘 따라올 아이일 테다. 손잡지 못한 둘과 둘에겐 '선생님 엉덩이' 뒤에 따라오란 말을 부끄럽지도 않게 큰 소리로 말한다. 안전과 규칙이 우선하기에 선생님의 엉덩이는 '안전 제일, 참새 짹짹'의 동의어이다. 빨래를 널던 손은 그대로인데 염치없는 눈은 어느새 선생님 엉덩이에 가 있다.
빨래를 널고 화단에도 물을 뿌린다. 대부분 다육식물이라 자주 물 주지 않아도 되지만 아침마다 갈증을 느끼는 식물이 있다. 트리안이 그렇고 기왓장에 심은 마삭, 동시 동화 숲에서 준 모기 쫓는 여린 꽃모종이 그렇다. 시누이가 사다 준 제라늄도 5일에 한 번은 물을 줘야 한다고 했다. 부지런한 사람이 제일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과 수분이다. 안 줘도 될 화분에까지 물을 줘 폐를 끼친다. 다행히 주택 마당에 드나드는 해와 바람이 내 실수를 만회해 준다.
잎 넓은 다육은 새잎이 올라오면 자연히 맨 아래 잎이 떨어질 준비를 한다. 신구의 이동이 자연스럽다. 베르길리우스는 운명 또한 '순환의 질서'라고 말했다. 생명의 순서도 질서다. 끝끝내 생명줄을 고집하는 볼썽사나운 늙은이 모습이 아니라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어른'의 모양새다. 올해도 옆자리에 끼어든 잡초와 동거하는 식물의 너그러움을 본다.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워내는 잡초의 애씀이 가상하다. 내 식물이 허락한 잡초라서 나도 못 본 척 넘어간다. 양식을 거둬드릴 곡식도 아니니 게으른 아량을 부려본다.
특별한 것 없는 보통의 나날이다. 딸아이가 집을 비우자 코로나에서 벗어난 것처럼 자유를 느낀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평범함을, 부지런한 한가로움을 원했단 말인가?
남편은 회사로, 딸은 배움터로 나갔다. 직업이 없는 나는 일상이 곧 일이자 채워야 할 알곡식이다. 그들의 뒤를 도와주는 매니저이자 코디다. 없는 그들을 챙기고 여전히 어려운 글을 채워가는 것이 집 나간 식구들에 대한 예의이리라. 저녁이면 다 쏟고 돌아올 그들을 위해 나를 채워 빈 집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