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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레스티얼 m Oct 12. 2023

유학기 <2> 남편을 만나다

이러려고 일본에 흥미를 가졌나 보다.

30을 바라보는 나이라서 조금 마음이 급해졌던 것 같다. 

본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수업의 난이도는 조금 올라갔다.


그 사이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나는 많은 기도와 개인적인 느낌으로, 비록 전공으로 선택한 학과가 돈 잘 버는 영역이 아닐지라도 선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전공을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그런 사이사이에도 일하면서 학교를 다니느라 힘든 적이 많았다. 제일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다. 


그런 바쁜 와중,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전공 수업만 듣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편입을 하느라 교양수업을 이전 학교에서 다 끝마쳤기 때문에 하루 내내 빡빡한 3-4학점짜리 전공만 듣다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졸업이 1년쯤 남은 시점에 새로운 시도를 해 보았다. 바로 일본어 수업을 듣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일본과 나의 인연은 깊다면 깊다 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시절 집에 아무도 없이 혼자 티브이만 보다가 슈퍼 그랑죠부터 일본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 결과가 무난한 지브리 애니메이션부터 조금은 인내심을 요하는 건담시리즈까지 섭렵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일본어 실력도 자연스럽게 늘게 되어버렸다. 10대 시절 내 한 가지 생각은 한국 노래와 티브이 프로그램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어차피 한국어는 모국어고 노래나 영상으로까지 더 소비할 필요는 없으니 차라리 다른 언어의 문화를 즐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한 것이 일본 만화와 노래만을 듣게 된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에도 일본어로 제2외국어를 했지만 그때쯤에는 너무 만화를 많이 본 덕에 친척을 따라 잠시 일본에 갔을 때 길 가던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랬던 것이 미국에 와서 어학원의 일본인 친구들을 알게 되며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연습하는 기회로 이어졌었다. 그런 일본어 연습(?)은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일본어 수업을 듣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때 내가 수준에 맞다고 생각한 수업이 미국인 학생들이 일본에서 1년 반-2년 선교사업을 갔다 온 후 듣는 대학 3학년 레벨 수업이었다. 수업엘 들어갔는데 그 수준의 학생이 대부분 선교사업을 가는 남학생들이었다. 여학생은 나와 내 친구 단 둘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매 수업 거의 똑같은 자리에 앉게 되어 다른 학생들과는 말을 섞을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항상 구석에 앉던 아시안 혼혈 남학생과는 특히 인사도 할 겨를이 없었다. 가끔 시선이 가는 것이, 아직 막 선교사업을 다녀와 어린 나이기도 했지만 특히 까불까불 한 것 같으면서도 예쁜 눈이 흥미로운 학생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선교사업을 다녀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나와 나이차이가 큰 것은 알고 있었다. 다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아예 같은 지역으로 선교사업을 간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큰 무리처럼 느껴져 조금 더 말 걸기가 어렵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시안 혼혈 학생 (S라 부르겠다)이 내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했고, 일본인 혼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나와 선교사업을 같이 했던 어떤 사람과 사돈 지간이라는 것이다! 신기한 인연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우리 수업의 조교였던 스타일이 좋은 일본인 2세인 T가 학생 한 명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느껴졌다. 그 T의 요청으로 우리는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T가 관심 있어하던 학생, 그리고 그 학생의 친구였던 S와 나 네 명이서 함께 밥 먹으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물론 S와 나는 약간 꿔다 놓은 보릿자루 느낌이었으나 나는 같이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그 일로 며칠간 자주 수업 후 함께 걷게 되었다. 


그러던 중 S와 페이스북 친구를 맺게 되고, 메시지로 시험 관련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둘 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학교의 대학생들은 거의 모두 학교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날 S는 늦은 밤 내가 살던 아파트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대화는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S는 처음 내 일본만화력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대화의 주제가 이니셜 D나 건담, 코난 등이었다. S는 8남매 중 넷째라고 했다. 본인은 가난하게 자랐고, 생활비와 학비 전부 자기가 부담하기 때문에 바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 쪽을 공부하는 그는 학교 웹사이트 서버를 담당하기 때문에 새벽에도 일을 해야 했고 말하지 않아도 성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며칠간 우리는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고, S가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오묘한 느낌이 있었다.


며칠 지나자 S가 페이스북으로 내게 다소 소심한 식사 신청을 해 왔다. 자기는 점심으로 집에서 일본식 크로켓을 만들 예정인데 같이 만들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이걸 데이트라 부른다. 나는 종종 데이트 신청을 받았는데 이 학교의 캠퍼스 문화는 지나가다가 누군가와 인연이 닿으면 모르는 사이라도 밥 먹자고 데이트 신청하고 받는 일이 일상이었고, 가난한 학생들의 데이트래봤자 같이 밥 한 번 먹고 영화 보고 하는 것뿐이었지만 나에게는 바쁜 공부 중 잠깐의 기분전환 같은 것이더랬다. 물론 이 교회에서는 가족은 영원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데이트 신청 날짜가 마침 내가 오랫동안 알아오던 동생이 같이 밴드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한 날이기도 했다. 이 동생도 남자였기 때문에 데이트신청 같은 느낌이라 나는 괜히 진지해졌다. 한 명에겐 예스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노 를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 했다. 이때쯤 나는 30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국 학생들은 하나 둘 결혼을 하는데 외로운 느낌도 드는 시기였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고, 다른 젊은 여학생들에 비해서 그다지 꾸미지 않는 외모의 나는 지나치게 평범한 축에 속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이성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왜 이렇게 에너지가 쭉쭉 빨리는 느낌이었는지, 그래서 정말 고민하다가 S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데이트에서 우리는 즐겁게 크로켓을 만들려 했으나, S가 기름 온도를 너무 높인 나머지 동그랗게 잘 모양이 잡힌 그 빵가루 묻힌 감자 덩이를 넣는 순간 새카맣게 타 버렸고, 우리는 그래도 웃으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어찌어찌 저녁을 먹고 나자 내 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전화기 너머로 친구가 뜬금없이 물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 나는 일단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S에게 물었다.

"친구가 데이트하냐는데, 우리 지금. 데이트하는 거야?"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나는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후속 질문을 했다.

"미국 식으로? 아시안 식으로?"

미국식 데이트라는 의미는 한 명만 만나는 게 아닌 문어발식 데이트였고 서로 약속하지 않는 이상 미국 문화에서는 그것이 용인되는 듯했다. 아시안 식이란 내 말은 한국에서의 남녀관계처럼 서로만 만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S가 후자를 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5살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S는 급발진(!)을 하기 시작했다.

일하거나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대화를 나누는 페이스북 메시지로 갑자기 내게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내 재정관념은 어떤지에 대한 질문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 질문 중 하나가 만약 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뭘 하겠냐였다. 나는 집의 소유나 빚의 유무가 삶의 큰 문제인 훌륭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집을 사드리고 나도 사고 학비를 나눠놓고 저축을 하고- 뭐 그런 대답을 했다. S에게 같은 질문을 되물으니 자기는 십일조 (교회에 10분의 1의 수입을 내는 것)를 내겠단다. 악- 내가 질문자의 의도를 못 깨닫고 낙제해 버렸나? 그런 생각에 실소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고 우리는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나 자신을 숨기지 않고 대답하고, 서로 질문하며, S도 우리의 관계를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행힌 것은 둘 다 내향인 성향인 데다 학교생활로 바쁘다 보니 인터넷이 서로를 알아가는 톡톡한 일등공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한 달쯤 지났을까, S가 자기 가족이 일 년에 두 번 모일 수 있는데 그것이 다음 달이라면서 나를 초대했다. 가. 족. 모. 임? 이것은 부모님에게 나를 소개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대학생이 되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부모님을 만난 적은 없었다. 뭔가 굉장히 빨리 진행되는 느낌이었으나, 나도 용기를 내서 가자고 했다.


한 달 뒤 미국 추수감사절 즈음에 나는 10시간이 걸려 차로 S의 누나 집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S의 가족과 부모님을 만났고, 일본인이신 시어머니는 내가 사간 초콜릿을 받자마자 바로 시댁 자녀들에게 내밀긴 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스무스하게 지나갔다. 시어머니는 알고 보니 초콜릿을 싫어하셨다^^; 백인이신 시아버지는 자상하신 분이셨다. 시종일관 나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나중에 시아버지께서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시는데 내가 문으로 들어오는데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내가 어색할 때마다 실없이 웃기는 잘한다. 어쨌거나 무언가를 느끼셨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결혼에는 반대도 장애물도 없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는 엄마에게 통보하듯 결혼할 사람을 만났다고 말했고, 부모님도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윗감이지만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다. 화상채팅을 하긴 했는데 결국 실제로 만난 것은 부모님이 미국으로 오신 결혼식 며칠 전 날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약혼과 결혼을 거쳤다. 재밌는 것은 결혼식장이 될 교회의 성전 (일요일 교회모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영원한 결혼 등 특별한 의식만을 치르는 곳으로 한국에도 작은 서울 성전이 있다)을 내가 우겨서 결혼 6개월 전부터 약혼도 하지 않고 미리 예약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 같이 반지를 고르고, 남편이 그 성전 앞에서 수많은 사람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서프라이즈 프러포즈를 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부가 된 우리는, 허니문 시기에 좁은 아파트에 식탁을 사네 마네 해서 내가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간 것 이외에는 아주 무탈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혼 첫 해가 되자마자 나는 졸업을 했고, 동시에 아기가 생겼고, 9달 뒤 첫아들을 낳았다. 그 이듬해 남편이 졸업한 후 같은 주에서 직장을 얻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는 싸울 일도 없이 10년째 결혼생활을 해오고 있는데, 아직 잘 깨를 볶고 있다. 남편은 아이들보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도 남편이 일하느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해도 아빠를 존경하도록 가르치려 하고 있다. 이 얘기는 육아기에서 더 이어가고 싶다. 다음 글은 유학기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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