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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 Jan 10. 2023

엄마도 아.친.맘이 불편하다.

어쩌다가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대

지이잉-

이른 오전부터 단톡방 알람 진동이 울렸다.

출근하자마자 바쁘게 오전근무를 하느라

PC카톡도 미처 켜놓지 못한 상태다.

알람을 쉬는 시간 종 삼아서 하던 일을

내려놓는다.


주니맘: 여러분 잘 지내고 있어요?

             아이들도 학교 잘 다니고 있죠?

             코로나로 얼굴 못 본 지 오래됐는데

             다 같이 한 번 뭉쳐요~


군대보다 더 끈끈하다는 조리원 동기의

단톡방에 오랜만에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냈다.

ㅇㅇ맘의 메시지에 다들 좋다고 동의하고

괜찮은 요일과 시간대를 맞춰본다.

대부분 아이를 학교에 보낸

평일 오전시간이 좋다고 한다.

이 분위기에 워킹맘은 찬물 뿌리는 말을 해야 한다.


  나 : 죄송해요ㅠㅠ저는 일하느라 평일은

         힘들 것 같아요ㅠㅠ 저는 생각하지 마시고

         편하게 만나세요.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을 맞춰보자고

주말 시간을 맞춰보자는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주말에는 저마다의 선약으로 일정 맞추기가

쉽지가 않았고, 결국 오랜만의 해우는

그렇게 성사되지 못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가진 감정은 반반이었다.

찬물을 뿌린 것 같다는 불편한 마음 반,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반.

솔직히 안도감이 쬐끔 더 컸다는 건 비밀.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니

이전까지 일을 하던 워킹맘도

육아휴직을 쓰거나 퇴직을 하며

아이에게 전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뉴스에는 맞벌이 부부가 많다는데

내 주변에는 다들 여유가 있는 건지

직장이나 장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기존에 알던 몇몇 엄마들과 만나고

마주치는 일이 워킹맘에게는 어렵다.



가끔 연차를 쓰고 아이 등교를 시키는 날에는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엄마나 아빠가

아닌 다른 손을 잡은 아이들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코로나19로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엄마들의 반모임이 없다.

천만다행이다.

오로지 아이로 인해서 묶인 관계는

언제나 불편하다.

내가 아닌 다른 가면을 쓰고

상대를 대해야 하는 것만 같은 불편함이

아친엄(아이친구엄마)과의 만남을 피하게 한다.

솔직한 나를 보일 수 없는 관계는 정신력을 좀 먹는다.(출처: 픽사베이)


아이가 아직 갓난쟁이였을 시절에는

같은 처지인 엄마들에게 서로 물어보며

상부상조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불편하다.

육아를 잘해보자는 마음에 단톡방으로

모였던 엄마들은 육아에 익숙해지고

자기만의 육아철학으로 아이를 키운다.

각자의 환경과 생각에 따라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이 저마다 다르다.

그 사이에서 나만의 원칙을 고수하며

꿋꿋하게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비교를 하게 된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데에 있어서

‘교육’이라는 키워드가 끼어들기 시작하며

더더욱 비교를 하게 된다.

ㅇㅇ이는 영어유치원을 다닌대.

XX는 학원을 몇 개 다닌대.

누구는 한글을 언제부터 읽어서

언제 읽기독립을 했다는 둥,

다른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 아이와의 상황을 비교한다.

누군가는 부러움과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는 훈계의 대상이 된다.



언젠가 이룰 자기주도학습을 꿈꾸며

일절 학습을 위한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있는

우리 아이는 항상 호기심의 대상이다.

전체적으로 발달이 빠른 아이라

내가 해주는 것보다 보이는 결과물이

좋은 아이라서 주목을 받는 편이다.

아이에 대해 그런 관심을 받으면 난감하다.

학원이나 학습지라도 하면 그것만 말해주면 된다.

그런데 같이 계획 세워서 책 읽기, 영어영상 보기,

매일 2페이지씩 연산문제 풀어본다고 말하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이내 평정심의 가면을 쓰고 말한다.

“아유~ ㅇㅇ이가 워낙 똑똑해서

혼자서 잘하나보다. 우리 애는 어림도 없어.“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내 손이 무안해지게

가면 뒤 그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애 엄마가 집에서 애를 잡네. 독하다 독해.‘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놀이학습으로

가르쳐주는 학원을 보내지. 저 집에 돈이 없나?

아니면 가르쳐주지 않는 비법이 있나?‘

‘학원 다니는 우리 XX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집에 가서 XX이도 똑같은 문제집 사주고

풀어보라고 해야겠다.‘

 그 마음의 소리들이 나를 점점 죄스럽게 만든다.



나라고 그들이 부럽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도 도움이 된다면 사교육도 시켜보고 싶지만

아이의 성향상 그게 안된다.

나도 영어유치원이나 놀이유치원 보내보고

싶은데 아이의 성향과 경제적 상황이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영어놀이학교에서 수영, 골프, 테니스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도 시켜주고 싶다.

피아노 말고도 그럴듯한 악기도 시켜주고 싶다.

그런데 아이도, 나의 경제 상황도 그게 안된다.

아친엄들로 인해서 내 현실과 그들을

비교하는 마음으로 내가 작아진다.

마음이 맞는 엄마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대부분은 나를 계속 죄스럽고 작아지게 만든다.


서로 불편한 감정을 마음 한구석에 남기고

그렇게 아친엄과의 만남이 마무리된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한다.

그냥 앞으로 아는 엄마들을 만날 일도,

굳이 마주칠 일도 없으면 좋겠다고.

아이들이 엄친아가 불편하듯이

엄마도 아친엄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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