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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14.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11. 일단 해보라는 딸 덕분에 대학원에 진학하다

   일반적으로 사십 대라는 나이는 뭔가를 이루어 가는 나이이지 새로 시작하는 나이는 아니다. 특히 공부는 더욱 그렇다. 물론 공부가 원래 따로 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업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늦다는 생각이 드는 나이였다. 내 나이 마흔셋, 큰아이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나서 아주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고 느꼈다. 


   그동안에도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늘 혼자 책을 읽었다. 장르문학은 예전에 떼었고, 역사서로 넘어갔다가 결국 인문학에서 사회과학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서양미술사를 읽다가 맹자와 장자를 읽었고, 와인 관련한 책을 보다가 관상책을 읽었다. 나는 어떤 것에 꽂히거나 그 분야가 궁금해지면 책을 찾아 읽는 편이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읽다가 그리스 신화를 읽었고, 조선 후기 회화사에 꽂혀있다가 북유럽 신화를 읽었다. 사피엔스나 총균쇠 같은 최신 서적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계획 없이 그저 궁금한 것을 찾아 읽는 것만으로는 항상 뭔가 부족했다. 그 뭔지 모를 부족함이 뒤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을 다니지 못했던 것은 살면서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학력 때문에 치이고 무시당하고 좌절하는 일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한 일이고 나에게도 흔하게 겪는 일이었다. 심지어 배려하느라 선한 마음으로 양보했는데, 가족 내에서조차 그랬다. 직장을 다닐 때도 현실에서의 업무 능력보다 학벌이 우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을 나왔는지보다도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중요하며 대학을 한 줄로 세워 급을 매기고 거기에 맞춰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나는 삼십 대 후반부터 늦었더라도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과 같은 이유로 망설이고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십여 년을 ‘나’라는 존재가 없이 살았는데 뒤늦게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 선택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진학한다는 것은 책 한, 두 권 사서 읽는 취미생활과는 전혀 다르다. 시간과 돈을 일정하게 투자해야만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늘 가족들을 위해 스탠바이 중이었던 사람이, 한정된 돈과 시간을 자신에게도 투자하겠다는 결정은 가족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가족들은 표면적으로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결혼 전이나 후나 ‘나’라는 개인의 삶에 무관심하고 희생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가족들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지만, 나는 과감하게 입학금만이라도 지원해달라고 아이들 아빠에게 요구했다.


   자전거 라이딩, 등산, 캠핑, 수영, 골프 등등 온갖 취미를 섭렵하고 있으면서 나의 대학 입학금을 주지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삼십 대에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는 먹고 살기 어렵고 아이들도 어리다는 핑계라도 대었지만, 아이들 아빠로서는 아이를 유학까지 보낸 마당에 방송통신대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을 합쳐서 육십여만 원을 못 준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등록금만 내주면 그 후로는 장학금을 받아서 다니겠다고 큰소리를 땅땅 쳤다. 결국 나는 입학금을 받아 대학에 등록했다. 


   방송통신대학교라고 우습게 여기면 큰코 다친다고 하면서 입학하기가 쉽지, 졸업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오랫동안 엉덩이 붙이고 책에 코를 박고 사는 일이 사십이 넘어 뒤늦게 시도하는 사람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아파서 비실거리면서 네가 해낼 수 있겠냐는 염려와 날 미덥지 못해 하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진학을 결심하기 두 해 전에는 건강 문제로 죽다 살아날 정도로 고생을 엄청나게 했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났기 때문에 더 용기를 낸 것도 있었다. 먹고 살만 해졌는데, 이제 와 겨우 방송통신대학교의 학사 학위를 받아서 뭐를 하려는 거냐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들었다. 돈 되는 일은 관심도 없고, 돈 안 되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비난도 들었다. 대체로 그런 비아냥을 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고 날 우습게 여기던 사람들이 더했고, 사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존재들이 가장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더 성실하게 공부했다. 그냥 내가 해내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애들 아빠에게 큰소리를 쳤던 그대로 나는 전액 장학금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전액 장학금은 성적이 5% 안에 들어야 나오는 장학금이다. 늘 공부하는 습관이 잡혀있어서 어렵지는 않았지만,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해내는 것이 나를 우습게 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결국 일곱 학기 만에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부 졸업 논문으로 최우수 논문상도 받았다.      


   논문을 발표하러 간 자리에서 졸업 논문을 지도하셨던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졸업 논문 때문에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늘 긍정적인 회신을 하던 분이라서 좋은 인상을 받긴 했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감탄이 섞인 칭찬을 쏟아내셨다.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것도 떨렸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학생이라고 날 소개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교수님 덕분에 내가 뭐나 된 것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날 그렇게 띄워주고는 대화의 말미에 그 교수님이 내게 대학원에 꼭 진학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혼자서 이렇게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서 이 정도라면 대학원에 갈 자격이 충분하다고 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냥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학생에게 그냥 막 던지는 스승의 립서비스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칭찬이나 격려 같은 것에 늘 목말랐던 내 마음에 작은 씨앗이 하나 떨어진 것 같았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서 내 뜻대로 해석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분이 내게 말했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그 교수님의 말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마구 흘러갔다.


   솔직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독서량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자부했었다. 사실 대학에 다니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당시에는 대안 연구 공간이라는 곳에서 세미나도 두세 가지씩 참여했다. 그곳에서 니체와 들뢰즈를 공부했고 사회과학도 공부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도 따로 재미있게 듣고 있던 참이었다. 


   한참 공부에 빠져 지내던 무렵이라서 더 그랬나 보다. 교수님이 던진 씨앗이 싹을 틔우려는지, 가슴이 자꾸 콩닥콩닥했다. 차츰 공상 속에서 학교에 다니는 내 모습이 상상되었다. 방송통신대학교는 학기당 1번만 출석수업이 있다. 이틀 정도만 출석하면 된다. 그 외의 모든 수업은 인터넷으로 들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이제 진짜 대학 생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처럼 정식으로 학생이 되어 실제로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 상상만 해도 대학교에 다니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겁이 났다. 내가 괜히 김칫국물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 있는 딸과 화상통화를 하다가 딸에게 이런 내 심정을 말했다. 딸은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되냐는 듯이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봐!”


“대학원에 원서를 내라고? 어차피 안 될 거야.”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안 되어도 리스크는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 되면 말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내보라고.”


“쪽팔리잖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하면 되잖아. 아무도 모르는데 뭐가 쪽팔려?”


“그래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하면 면접관만 아는 거잖아. 떨어지면 면접관은 다시 안 볼 건데, 뭐 어때? 대학원에 가고 싶다며? 되는지 안 되는지 궁금하잖아. 그러니까 답답하게 굴지 말고, 그냥 한 번 해봐. 그 교수님이 가라고 했다며? 혹시 모르지만, 일말의 뭔가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


“…알았어.”


“내가 원서 냈는지, 안 냈는지 꼭 확인할 거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었을 때 심한 좌절감을 느끼지만,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 좌절감을 느낄 이유가 없으니 오히려 리스크가 전혀 없다는 말이 묘하게 설득되었다. 그까짓 거 좀 자존심 상하고 쪽 팔려도 면접관 말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원서접수비 6만 원 정도야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는 호기심 해결비라고 생각하고 용감하게 원서를 접수했다. 


   딸 말이 맞았다. ‘일말의 가능성’은 진짜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학원이야말로 진학이 어려운 게 아니라 졸업이 어려웠던 것이다. 심지어 내가 입학한 해는 원서를 접수한 숫자가 정원에서 미달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인문 사회 쪽 대학원 진학 인구가 엄청 줄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쉼 없이 대학원에 곧바로 진학하게 되었다. 딸의 ‘일단 해봐!’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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