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잘 키우는 것에 꽂힌 나는 공부와 봉사 외에도 전인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향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도 가르쳤고, 수영도 가르쳐보려 했다. 아동미술 자격증이 있는 나는 조카와 아이 친구를 데리고 아동미술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예체능도 다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는 바이올린과 수영을 한 달 만에 포기했고, 미술은 엄마인 내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영 소질이 없었다. 피아노를 곧잘 쳤는데, 어릴 때는 전공을 시키라는 말도 들었었다. 하지만 중간에 이사하면서 폭력적인 선생님을 만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가요를 듣고 혼자 음을 찾아가며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니 딸이 절대 음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듣는 귀가 발달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귀가 밝아 영어도 잘했던 모양이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해도 기본적인 소양을 키우기 위해 1년에 두 번 방학이면 꼭 미술 전시회를 갔다. 주로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명화 기획전을 데리고 가서 미술사나 화가에 대해 악착같이 설명해가며 전시 관람을 했다. 아이들은 그때 공부시켰던 내용들을 지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그때도 억지로 듣는 척을 하느라 기억 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리라.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 있지 않지만, 로뎅의 조각을 보았던 것과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 갔던 것, 일년에 두 번 열리는 간송미술관 전시 기간에 방문하여 관람했던 일들은 기억을 하고 있다.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온 가족이 영화관에 갔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만 아니면 나이 상관하지 않고 같이 영화를 보았다. 둘째가 어릴 때는 지나친 폭력 장면과 선정적인 장면에서 눈을 잠깐씩 가려 가면서 보았다. 영화 관람은 온 가족이 감상평을 나누며 대화하기에 아주 좋았다. 예술과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음악 공연을 함께 보는 것은 못했다. 딸은 아이돌 콘서트를 보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다. 이런 건 아무래도 부모 취향을 따르게 되는 것 같다. 또 비용의 영향도 무시 못할 문제다. 뮤지컬이나 오페라 입장권 가격을 듣고 나는 진즉 포기했다.
우리 가족은 등산과 캠핑을 많이 다녔다. 부모가 산악회에서 만난 까닭에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달에 한 번은 자연스럽게 산과 숲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아기 때부터 아빠의 어깨에 맨 캐리어에 앉아 산천 유람을 했는데, 아이들이 크고 부모가 늙으면서 등산은 캠핑으로 변해갔다. 산악회에 속해 있던 이모와 삼촌들이 하나, 둘 결혼하면서 아이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산악회 아이들 그룹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딸은 동생들을 챙기는 멋진 언니가 되었다.
지금도 산악회 아이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칼싸움을 하던 것, 모닥불에 머쉬멜로와 고기를 굽다가 불장난을 했던 일, 계곡이나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던 기억이 아이들에게 남아 있다. 리조트나 호텔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캠핑과 등산을 훨씬 좋아했던 아빠로 인해 숲이 주는 다양한 감각을 충분히 경험하게 되었다. 리조트나 호텔에서 느낄 수 없는 냄새와 소리, 풀과 나무, 새와 곤충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풍경들은 아이들에게 자연과 밀착된 특별한 느낌을 제공했다.
아주 춥거나 더운 계절에는 휴양림을 예약해서 갔다. 한 번은 폭설이 쏟아져 도로가 통제될 정도였는데도 우리는 눈길을 뚫고 휴양림에 도착했었다. 휴양림 전체에 우리 가족과 또 한 가족만 있었는데, 그래서 사방이 새하얀 눈천지였고 아이들에게는 휴양림 전체가 눈썰매장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무 데서나 눈썰매를 타고 아무도 없는 하얀 세상을 마음껏 즐겼다.
우리는 늘 바빴다. 공부하고,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문화를 즐겨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요리를 하고 생협 모임에 참여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후회 없이 보내야 했다. 그런데 딸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게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우리 딸의 다양한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교외 대회에도 나갈 수 있도록 추천해주신 분이었다. 당연히 나로서는 좋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이 상담시간에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 아이가 너무 열심히 살고 있어요.”
“아, 저희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놀기도 해요. 캠핑이나 여행도 많이 다니고 있고요. 공부만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문화생활도 하고 책도 많이 읽히고요.”
“그러니까요. 그게 문제에요. 이 아이는 우수한 아이고 모든 면에서 다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단 하나 한가한 시간이 없어요.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여백의 시간도 필요해요. 뒹굴뒹굴 구르면서 생각하고 공상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늘 바빠서 그럴 틈이 없어요.”
나는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여러 육아 서적을 읽었고, 읽은 바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부가 실력이고 성적이 최종 승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나라에서 나름 균형 잡힌 아이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하지만 선생님이 보기에 아이나 나나 우리가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가 전혀 울림이 없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내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때여서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하지만 살던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우리는 뭘 하든 일단 열심히 하는 성격이고 빈둥빈둥은 성향에 맞지 않았다. 딸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고 요구가 많았다. 한정된 시간이 아까워서 열심히 할 일을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일을 처리해야 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딸, 우리 셋은 쉽게 우리의 루틴을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둘째의 경우는 달랐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많이 반영했다. 하기 싫다면 그만두게 했고 뒹굴뒹굴, 빈둥빈둥을 봐주었다. 그래서 둘째는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미술을 택하게 된 것일까? 어쨌든 둘째의 경우는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히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딸과 나는 서로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결사적’으로 사냐고 서로 놀리면서 여전히 열심히 결사적으로 살고 있다. 사람은 암만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