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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12.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9. 이웃을 돌아보는 삶

   나는 한 생협의 조합원으로서 임원 역할까지 맡았었다. 두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짬을 내어 하는 활동이라서 크게 부담이 없었다. 아이들의 아토피 때문에 시작된 생협 활동은 어려운 농촌 문제, 식품 안전과 먹거리 문제, 식량자급률과 환경 문제 등으로 내 시야를 넓혔고 둘째가 아기티를 벗어나면서 활동력이 커졌었다. 

   활동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고, 지역의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활동도 시작되었다. 나와 함께 활동했던 봉사팀원들은 자신의 아이들만 안전하고 좋은 먹거리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의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가능한 만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우리는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학교 밖 청소년 센터, 한부모 쉼터 등 지역에 도움이 필요한 곳들과 네트워킹을 만들고, 식생활 교육과 간식 만들기, 식재료 제공, 당일 판매되지 않은 빵 나눔, 생태체험 활동 등을 통해 아이들을 만났다. 


   이런 활동이 많아지면서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추어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무렵에는 지역 대표가 되어 더 바빴으므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앉혀놓고 물어보았다. 엄마가 너무 바쁘거나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가족의 손길이 충분하지 않은 다른 아이들을 위해 너희 엄마를 한 달에 한, 두 번쯤 양보해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말해보라고 했다.     

“너희는 거의 매일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서 주잖아. 한 달에 한, 두 번쯤 다른 아이들한테도 간식을 만들어주도록 엄마를 양보해줄 수 없을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과 함께 쿠키나 케이크를 굽거나 호떡과 전을 부치는 일을 놀이처럼 같이하는 일이 많았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하는 요리 시간을 아주 즐거워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런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잠깐씩은 엄마를 양보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의 봉사 활동에 대해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딸은 엄마를 잠깐 양보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중학교 2~3학년부터 방학이면 엄마를 따라나서서 보조 선생님 역할을 자처했다. 다른 봉사활동처럼 봉사활동 점수를 주지 못한다고 하는데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 내가 다른 일이나 회의가 있어서 불참하게 된 날에도 딸은 다른 팀원 아줌마들을 따라나서기도 할 정도여서 다른 팀원들이 준팀원으로 인정해줄 정도였다. 여름 방학이면 쌀국수 요리를 많이 했는데, 우리 딸이 하도 국수를 많이 삶아서 쌀국수 삶는 것은 나보다 솜씨가 훨씬 나을 정도였다. 방학에 한국에 나오면 줄곧 함께 봉사를 다니던 딸은 대학 입학 후 비정기적인 지원 요청에도 스스럼없이 응할 정도로 이 활동을 좋아했지만, 조직 개편으로 봉사 조직이 사라지면서 활동이 중단되어 무척 아쉬워했다.     

   엄마와 함께하던 봉사 활동의 경험은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대학에 들어가서 우리 딸은 국제 의료봉사 동아리를 들어갔다. 그 동아리는 의료봉사를 위해 자금을 모으고 일년에 한 번 의료 보건 체계가 뒤떨어진 어려운 나라에 직접 봉사 활동을 가는 동아리였다. 딸은 온두라스와 파나마 두 곳에 의료봉사를 갔었다. 이태석 신부로 인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딸은 자신이 언젠가 의사가 된다면 이런 활동을 정기적으로 하고 싶다고 밝히곤 했다. 그래서 이 동아리 활동에 대한 기대가 컸고, 열심히 참여했다. 


   멋모르고 참여했던 첫 번째 경험에서와 달리 두 번째 참여했던 파나마 봉사 활동에서 딸은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한 남학생과 크게 부딪혔다. 고생을 모르고 컸을 법한 그 부유한 백인 남학생이 파나마에서 의료봉사를 위해 준비한 물자를 아끼지 않고 때로는 자신을 위해 막 썼던 모양이었다. 딸은 참지 못하고 그 물자들이 파나마의 어린 아이들을 돕고 생명을 구하는 데에 써야 한다면서 지적질을 했다. 딸은 그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솔직히 불을 뿜는 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생을 사는 동안 경제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단 한 번도 차별을 경험하지 못한 데다가, 머리까지 좋고 잘나서 항상 무리의 꼭대기에 서 있는 부유한 백인 남성 중에서도 공감 능력이 유난히 떨어져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경우 발생하는 문제라면서(실은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고…) 그 어이없는 일에 대해 내게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그때의 경험과 분노가 자양분이 되어 딸은 그 봉사 동아리 회장에 출마했다. 두 사람의 말싸움을 직관하고 딸의 의견에 공감했던 다수 아이들의 지지를 받아 딸은 기어이 동아리 회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후 코로나19가 터졌다. 딸이 리더가 되어 가려고 했던 세 번째 봉사 활동이 팬데믹의 상황에서 취소되었다. 귀국한 딸이 가장 속상해했던 일이 자신의 지휘하에 봉사 활동을 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멋진 봉사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죽어나는 귀족집 아이들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조금 아쉽다.     


   또 호스피스 병동에서 몇 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죽음을 앞둔 할머니 한 분의 말벗을 했다. 사실 딸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알콜 중독과 함께 그로 인한 망상 장애와 분노조절 장애 같은 다양한 문제를 보였다. 그래서 강제 입원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병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면서 다른 가족들이 다 외면해버린 할아버지를 홀로 8년 동안이나 돌보느라 힘겨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딸은 노인 돌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결국 딸의 호스피스 병동 봉사가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돌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슬픔에 빠진 딸은 긴 이야기를 내게 전했다. 서먹서먹했던 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초점 없는 눈으로 감정 없이 낯선 방문자를 바라보던 시기를 지나 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작은 반응을 보여주던 날들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할머니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면서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엄마, 그 집도 엄마처럼 딸 하나가 그 할머니를 전적으로 돌봤었어. 형제는 여럿이었지만, 다들 핑계를 대면서 외면했고 딸 하나가 홀로 돌보느라 늘 힘들어했어. 처음에는 나랑 말도 별로 안 했는데, 나중에는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하더라. 그런데 그분한테 다 떠맡기고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가족들이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잘 모셨니, 못 모셨니 말은 많고 유산에서 자기 몫은 얼마나 되는가만 챙기더라. 결국 마음 약하고 착한 사람만 고생하는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똑같은 것 같아.”    

 

   

   석박사 학위 과정 중에 공부하느라, 돈 버느라, 그리고 동생과 할아버지를 돌보느라 잠도 못 자고 전전긍긍해서 늘 피로에 시달리던 엄마에게 딸은 마음 깊이 위로를 전했다. 사실 내가 바쁠 때는 우리 아이들이 나 대신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도 많았다. 다른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욕설과 폭력을 핑계로 자신의 아이들은커녕 본인도 모른 척하는 마당에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할아버지를 환자로 봐주고 적극적으로 돌봄에 참여하여 참 고마웠다. 그리고 할머니를 돌보면서 호스피스 환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딸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도 항상 따뜻하고 웃는 낯으로 대했다. 아버지도 손녀 딸만 나타나면 평상시답지 않게 부드러워졌다. 


   내게 가족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효도는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서로 강요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이 매번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작다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정의롭고 옳은 것과 자신의 이해를 일치시켜 보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가 뻔한 데도 굳이 그 부분을 콕 집어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 장애인 환자도 환자다. 정신 장애인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단지 의도치 않게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치매 환자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저 진행 속도나 병의 경중에 따라 입원도 하고 치료도 해야 할 뿐이다. 내 딸에게는 다행히 그런 설명이 필요 없었다. 어른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 자세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를 빠르게 했다. 자랑 같지만, 이웃을 돌아보고 봉사를 생활화 하도록 만든 것은 아이에게 의사로서 소명의식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울 때, ‘나’라는 존재의 확장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큰 나는 가족이 되기도 하고, 이웃이 되기도 하며, 지역사회와 국가를 넘어 인류와 지구 생태계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윤리와 도덕, 사회 질서와 생태계 보호는 더 큰 ‘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 고통받는 가족을 외면하는 사람이 뭇생명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성공을 위해 의사가 되라고 한다면 생명을 구하는 의사는 만들지 못하고 미용 기술로 돈 버는 의사만을 만들 뿐이다. 그리고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의사는 의사라기보다 의료기술자 또는 미용기술자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그런 기술자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서인지 자기 얼굴이 아닌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도 요즘은 너무 많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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