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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11.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8. 가장 효율적인 책 읽기

   내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식을 유학까지 보냈으니, 보통은 부유할 것으로 생각한다. 딸도 엄마도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학비를 따져봐도 그렇고, 후덕하게 보이는 살집 때문에 그런지 고생이라는 것을 통 모르고 산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도 들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어느 대통령 말마따나 나는 안 해본 일이 없고, 우리 딸은 옆에서 늘 엄마의 고생을 보면서 컸다. 


   나는 물도 잘 안 나와 세탁기 한 번 돌리려면 하루 종일 돌려야 하는 지은 지 수십 년 된 낡은 빌라 5층 꼭대기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사라졌는데 일산 끝에 있던 그곳은 버스도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장을 보고 오면, 아기를 앞으로 안고 한 손에는 기저귀를 다른 손에는 물티슈나 그 외의 것을 들고 5층을 올라가야 했다.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려 1층에 서면 한숨부터 나왔다. 가난은 꽤 지속되었다. 애들 아빠가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해서 자리를 잡는데 13~14년 정도 걸렸다. 그 사이에는 전세 보증금을 빼 지하 월세방을 얻거나, 간신히 산 집을 팔아 빚을 갚고 다시 월세로 이사하는 등 이런저런 경제적인 위기를 줄곧 겪으며 그저 버텨야 하는 삶을 살았다.   

   

   딸이 서너 살 무렵에는 한 살 터울의 딸을 키우는 언니네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당연히 자주 언니네를 방문했다. 우리가 놀러갔을 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었던 그 집에는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할 때가 있었다. 딸은 학습지를 하는 조카를 너무 부러워했다. 선생님이 오면 자기가 먼저 가서 책상 앞에 앉아 그것을 하겠다고 덤볐다. 때로는 조카가 대답해야 하는데 가로채서 먼저 대답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민망해서 아이를 끌어다 놓으면 어느새 책상 앞으로 달려가 눈을 빛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던 터라 조카의 옷도 다 물려받아 입었고, 애 아빠나 딸이나 뱃골은 커서 언니네 냉장고를 한 번씩 싹쓸이하던 시절이었다. 잔반 처리반이나 하이에나라고 우리 가족을 스스로 칭하면서 자학 개그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차에 딸이 언니의 학습까지 가로채고 있으니 안될 일이었다.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면 딸은 왜 안되냐고 물었다. 딸의 입장에서는 좋은 것, 하고 싶은 것은 다 언니의 몫이었다. 우리는 쓰다 준 것도 감사했지만, 어린 딸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렸을 때 세상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 싫었고,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주 못마땅했다. 그래서 이십 대 시절 한 때는 야학교사를 하기도 했었다. 내 결혼에 가족들이 완강하게 반대한 이유는 실은 가난 때문이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결혼의 방해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들 아빠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서 아껴서 살림을 하는 데도 가난하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내 가치관과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내가 불편하고 힘든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학습지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속상해서 눈물짓는 딸을 보는 것은 솔직히 너무 안타까웠다. 딸은 어느 순간부터 “엄마, 우리는 돈 없지? 우리는 돈 없어서 나는 그거 못하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딸의 질문은 나를 정말 슬프게 했다.

  

   돈 없이 자식을 잘 키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라고 들었다. 아이를 낳기 전후 쌓아놓고 읽었던 육아 서적들에 그런 말이 쓰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고 반납하는 것 하나만큼은 정말 열심히 했었다. 집에서 TV를 없애고 책을 잔뜩 빌려다가 그야말로 목에서 피가 나도록 책을 읽혔다. 딸이 태어났을 때 글자가 없는 동화책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그림이 없는 청소년용 삼국지까지 한결같이 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자는 결심을 하고, 실감 나는 목소리 연기로 딸의 혼을 뺐다. 하루에 이삼십 권은 기본이었다.


   만 삼십 개월이 지날 즈음에 딸이 글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목소리뿐 아니라 손가락을 사용했다. 문장에 형광펜으로 줄을 치듯 손가락으로 훑으며 읽는 것은 한, 두 권 정도라면 모를까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글자 익히기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손가락이 뻣뻣해질 때까지, 검지의 첫 번째 마디가 부어오를 때까지, 딸이 먼저 지치지 않는다면 늘 그렇게 책을 읽었다. 덕분에 딸은 학습지도 없고 아무런 부담감도 없이 저절로 두어 달 만에 한글을 떼었다. 만 세 살이 되기 전이었다.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억지스럽지 않도록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었다. 나는 수학을 좋아하고 영어를 싫어했다. 영어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영어 단어 외우기가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우리 딸은 영어가 무조건 신나야 했다. 나는 영어 동요 테이프를 틀어놓고 딸과 같이 춤추고 노래했다. 요즘 아이들도 그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다섯 마리 원숭이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내용의 동요를 침대 위에서 같이 뛰며 불렀다. 공기청정기도 없던 시절, 먼지는 좀 마셨지만, 해줄 수 없는 일을 포기하고 해줄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딸이 열두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위인전에 재미를 붙였을 때였다. 위인전 전집을 몇 세트 읽었는데, 그때 우리 딸에게 인상적이었던 책은 슈바이처와 이태석 신부의 책이었다. 그게 결국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딸은 의사라는 직업에 원래 호감을 가지고 있긴 했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그러나 확고하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결심을 전한 것은 위인전을 읽고 나서였다. 참 신기했다. 선생님도 좋아했고, 피아노도 잘 쳐서 피아니스트가 되라는 소리도 들었고, 영어를 아주 잘해서 학교 대표로 스피치 대회에도 나갔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훌륭한 위인들 중에서 왜 유독 그 책들이 우리 딸에게 꽂혔을까? 딸은 훗날 슈바이처 박사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의 책은 두고두고 아이의 가슴에 콕 박혔던 것 같다. 아마도 ‘울지마 톤즈’라는 이태석 신부에 관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꿈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꿈이 없고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살아가는 데에 의욕을 가질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딸의 꿈이 진짜 목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붙잡고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열에 하나는 의사라고 대답하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의사가 되지는 않으니 우리 아이에게도 그저 멋진 장래 희망이 생겼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엄마, 의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공부를 아주 잘해야지. 특히 수학, 과학은 최고가 되어야 할걸?”  

   

   우리나라에서 의대에 가려면 공부, 특히 수학과 과학을 잘해야 한다는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했다. 그런데 딸의 장래 희망이 학습 의욕을 고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유난히 탁월했던 영어에 비해 그다지 즐기지 않았고 또 어느 정도는 억지로 하던 수학을 딸은 그 후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미디어가 중요하다고 하고 동영상으로 학습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시대다.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말도 나올 정도이니 어느 정도는 시대의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행위가 가져오는 장점을 미디어가 전부 다 대체할 수는 없다. 요즘 시대에 쉽지 않지만, 아이에게 책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행간을 읽으면서 커지는 생각의 힘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로서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이었고, 우리 딸은 책 속에서 꿈을 찾았으니, 독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긍정적이며 효율적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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