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면에서는 완고하고 지독한 엄마였다. 그 이유 중 1순위는 무엇보다 스마트기기 사용 문제였다. 큰아이가 다섯 살 때 일이다. TV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아이를 발견하고 걱정을 하다가 TV를 치웠던 일이 있었다. 딸은 너무 심심해서 어쩔 수 없이 책을 읽고 영어동요 테이프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TV나 스마트기기 사용에 제한을 두는 건 그걸 만드는 재벌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 한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자신이 만든 것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게임 집착이 과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학습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일에도 도무지 집중을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집 밖을 나가지 않으려고 하거나 학교생활이 원활하지 못하며, 주 보호자인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폭력적으로 대응하거나 심지어 식탁이나 변기를 부쉈다는 일화는 수도 없이 들은 바 있다. 그중 몇몇은 결국 약을 먹기도 하고 좋아진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일이 과도한 스마트기기 사용과 모두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사례가 반드시 인과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수긍할 수 있다. 단지 나의 주장은, 아이들이 모두 등하교 길에 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린이 통학로에 굳이 30km 제한을 두는 것과 같은 이치였을 뿐이다. 문제는 스마트기기 사용 제한이라는 내 원칙으로 인해 아이들은 물론이고 주위 어른들의 무수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 방식, 아이들에게 지나친 스트레스를 주는 규칙,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의 한계, 제한이 풀어졌을 때의 반작용을 고려하지 않는 몰상식, 디지털 리터러시의 부족 가능성,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 악화 등등이 그런 것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 때 애들이 반항하고 엄마를 안 본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말이 걱정인지, 사이가 나빠지라고 조장하려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전두엽이 다 성장할 때까지는 내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주장했고, 전두엽이 다 성장했는지는 충분히 확인 못한 채 애초의 계획보다 조금 일찍 아이들에게 스마트기기를 허락해야 했다. 정답이 따로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이들과 아직도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내가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나는 여전히 내가 너무 물러터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집보다 우리집이 부모 자식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이들은 교우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또 인스타와 카톡 공해에 시달리는 것 같긴 한데, 큰 아이는 거기에 매어 있기보다 자신의 성공에 집착하며, 작은 아이는 운동하고 사진 찍으며 바깥 바람 쐬는 일을 더 좋아하니 절반의 성공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엄마가 늘 편하고 따뜻해서 생각만 해도 포근한 그런 사람은 분명히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엄마나 누나처럼 살 수는 없어. 난 그렇게 열심히 살 자신은 없어.”
언젠가 작은 아이가 내게 진지하게 한 말이다. 딸과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작은 아이의 말은 틀린 데가 하나도 없었다. 사실 삶은 다양하고 추구하는 가치나 행복을 느끼는 지점은 각자 다른 게 당연하다.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나와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문제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목표를 향해 죽어라 달리면서 서로에게 뻔질 격려의 하이파이브를 보내는 우리 모녀가 그 자체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부담을 주는 엄마라니! 경주마처럼 달리는 우리의 모습이 자신에게 과도한 강요를 하지 않았어도, 자신에 대한 채찍질로 느껴질 수 있다니! 안쓰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작은 아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삶의 태도를 바꿀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좀 억울한 부분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영재 소리도 듣고 영재 교육을 받았던 아이라서 나름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했었다. 그러던 아이가 중학교 내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하여 자전거 타고, 농구하고, 놀러다니는 것을 놔두었고, 심지어 코로나19 때문에 맨날 소파에 누워 유투브를 보는 것마저 감수했는데, 자기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우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거 아닌가. 아이들 말마따나 ‘헐-’ 소리가 저절로 나올 일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뒤늦게 자신의 적성과 취향을 찾아 미술을 하겠다고 나섰고 카메라를 둘러매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요즘은 대학 입학을 코앞에 두고 불철주야 아르바이트로 바쁘다. 누가 열심히 하랬다고 밤을 새워 가며 저렇게 돈을 벌러 다니는지…. 미술을 전공하고 있어서 감수성이 특별한 줄로만 생각했는데, 실은 긴 호흡으로 오래오래 공부를 하는 것보다 당장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일을 더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던 거다. 내 곧 아이를 붙들고 옆구리를 살짝 찔러볼 참이다. 너 왜 그렇게 열심히 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