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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09.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6.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

   나는 아이들을 의견이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힘에 끌려다니는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백프로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엄마가 원하는 대답이나 선생님이 바라는 대답을 하면 좋은 반응을 얻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결과일 뿐이다. 종국에 가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권태로운 삶을 살거나, 뒤늦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를 원망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 아이들은 늘 각자의 바람이나 욕구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했다. 가족 회식을 위해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왜 자신이 고른 메뉴를 먹어야 하는지 나머지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는 했다. 누군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으면 쉽게 끝나지만, 그렇지 않은 때에는 끝장 토론이 말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흔했다. 한 번은 합의가 되지 않아 결국 집으로 돌아가서 라면을 끓여 먹은 적도 있었다. 이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가정에서는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일인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남들이 볼 때는 웃기는 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그리고 상대를 설득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어보는 것은 작은 성취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 


   먹는 것과 입는 것, 영화를 보거나 여가를 즐기는 일뿐 아니라 어느 학교에 진학할 것인지 사교육을 할 것인지도 대체로 다 그런 식으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늘 토론했다. 때로는 지겨웠고 때로는 상처받는 일도 있었다. 물론 엄마의 결정권이 발휘된 적도 있었다. 예컨대 다니겠다고 했던 학원을 불성실하게 다니면 끊어버린다거나 원하는 만큼 치마를 줄이지 못하게 하는 일은 왕왕 있었다. 


   또 나는 스마트폰 사용 제한이나 컴퓨터 게임 금지 같은 것은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 일은 사춘기를 넘기는 아이들과 큰소리가 나는 전쟁을 장기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아이들의 문제는 각자의 의견을 따랐다. 간혹 내가 아이들에게 제안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했으며, 아이들 스스로 충분히 동의가 된 후에 엄마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이런 방식은 아이들에게 끌려다니는 엄마라는 주위의 비난을 감수하게 했다. 딸이 어릴 때 지나치게 아이의 생각을 묻고 징징거리는 아이의 말을 받아준다고 하면서 부모의 권위가 없이 아이를 키우면 나중에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하는 말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사람은 미국 애들이 부모 말을 잘 듣고 식당에서 뛰지 않는 이유는 지하실에서 몰래 애들을 패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조언하기도 했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이들과 끝없이 말싸움하는 것을 택했다. 끌려가기도 하고 끌고 오기도 했다. 나는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더 옳고 더 멋진 말에 끌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을 해서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과를 직접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이를 키웠기 때문에 보수적인 이모와 살던 아이는 다섯 달 만에 이모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영어 선생님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모가 어떻게 애를 이렇게 키웠냐고 데려가라고 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의견이 있는 아이로 키우기는 했지만, 버릇없는 아이로 키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모는 아이가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었다고 했고, 아이는 이모가 자신의 의견을 묵살한다고 했다. 문제는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버릇을 들인 내 탓이었다. 엄마도 아닌데,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어른에게 말싸움을 해가며 반항을 했으니! 


   하지만, 아이는 덕분에 종교의 자유와 얼마간 패션의 자유를 쟁취했고, 세상에서 둘도 없을 친구이며 언니이고 선생님이면서 두 번째 엄마인 앤드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또한 앤드리아의 가족이 우리 딸의 미국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다 좋을 리는 없었다. 한국말을 하고 싶어서 이틀에 한 번씩 엄마에게 전화했고, 한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먹어야 했으며, 어느 정도는 문화가 다른 미국인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엄마, 미국에서는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야 해. 안 그러면 뭔가 숨기는 게 있거나 잘못한 게 있어서 눈을 못 쳐다보는 줄 알아. 나는 애초에 미국식이었나 봐!”     


   이모에게 했던 반항에 대해 느물거리며 변명하는 딸을 호되게 야단쳤지만, 딸의 혼란은 인정했다. 자신을 키워주고 보살펴 주는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정도로 헌신적이지 않다고 해도 상대를 똑같은 인격체로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양육자와 아이가 잘 맞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족이나 친척이라도 가치관이 너무 맞지 않으면 서로 상처를 주면서까지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딸은 영어 선생님이었던 앤드리아를 만나 정서적으로 안정되었고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 집에는 늘 손님도 많았고,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이는 집이기도 해서 우리 집 중심에는 8명까지도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을 두었다. 그 식탁 위에서 우리는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늘 토론도 했다. 우리 집의 식탁은 그냥 밥을 먹기 위한 용도의 가구가 아니었다. 거실에 TV를 없애고 책장을 두었으며, 식탁을 집의 중심에 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딸을 낳고 막 육아 인생이 시작되면서 나는 육아 서적을 한 열 권 정도 쌓아놓고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책 중 어디에선가 케네디가의 밥상머리 토론 교육에 대해 읽었던 것이다. 나는 그 얘기에 감명받았고, 꼭 실천을 해보고 싶었다. 사실 읽은 것과 읽은 것을 말하는 것은 다르다. 그냥 읽기만 해서는 남는 게 많지 않은데, 읽은 것을 말할 때의 학습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을 하면서 학습한 내용이 정리되고 온전히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케네디가의 교육을 알게 된 덕분에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늘 시사주간지가 있어서 아이들은 오가며 한 번씩 주간지를 읽게 되었고 궁금한 내용이나 의문을 함께 나누기도 하였다. 대화의 주제는 위에서 말한 식사 메뉴에서부터 학업, 패션, 교우관계, 장래 희망, 시사 문제 등 다양했다. 어른들이 모여서 대화할 때도 나는 아이들을 방으로 들어가라고 쫓아내지 않았다. 옆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으로도 아이들은 어휘력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에 따라 가정에서 쓰는 어휘가 다섯 배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부모의 학력과 경제력을 뛰어넘는 어휘력을 갖길 바랐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도 어려운 어휘를 빼고 아이들 말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이 단어의 뜻을 물을 때마다 언제라도 대화를 멈추고 그 단어의 뜻을 설명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느새 그 단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곧잘 따라 쓰곤 하였다. 결론적으로 내가 아이들을 대가 센 아이로 키웠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의견이 있고, 그 의견을 말하고 글로 쓸 줄 아는 아이로 키운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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