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돈 때문에 겪은 고난
미국 의전원에 다니기 위해서는 1년에 1억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의대를 졸업하기 위해서 5억 가까운 비용이 드는 것이다. 1년에 1억 이상 버는 사람이 한국에서 5% 정도라고 한다. 아빠의 소득이 그 5% 안에 들더라도 나머지 가족들이 이슬만 먹고 사는 게 아닌 마당에 의전원 학비는 당연히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게다가 아이 아빠와 나는 대학 이상은 스스로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물다섯이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나이인데 부모라는 이유로 끝없이 아이들 학비를 지원하고 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부모도 남은 삶이 있지 않은가.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대학 재학 중에도 학자금 대출을 받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사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이 너무 적어서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학생이라는 말이 거의 없어졌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갈수록 명문 대학과 의전원 같은 곳은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로 채워지고 있다. 예체능은 훨씬 더 그렇다.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에 입학하는 데에도 부모의 경제적 지원 효과가 크고, 다니는 동안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학교에 다니는 동안 생활비나 용돈을 벌지 않고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아이들이 더 연봉이 높은 곳에 취업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나마 미국은 어려운 가정형편과 부모의 학력이 낮은 것, 그래서 맥도날드에서 오랫동안 알바를 했던 경험 같은 ‘개천에서 용나는 케이스’를 학생에게 가산점을 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어쨌든 재벌이 아닌 마당에 우리는 그동안 대학을 지원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의전원 등록금은 당연히 학자금 대출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 의전원 등록금은 비싸지만, 의사들 연봉도 워낙 높아서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의사가 된 후 몇 년 안에 금방 해결할 수 있으려니 해서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는 늦둥이 둘째도 고3이어서 들어가는 사교육비가 만만치 않았기에 두 아이를 다 지원하자니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의 경우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 미국인의 연대 보증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누가 내게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나도 질색을 하고 거절할 것인데, 누가 갑자기 우리 딸의 보증을 서 줄까. 우리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아빠로서는 학부 때처럼 언제 등록금이 들어간다고 하면 미리 빚이라도 얻든지 무슨 준비를 해놓았겠지만, 이번에는 학자금 대출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 준비가 없던 터라 난감했다.
갑작스럽게 미국에 사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보았으나 좋은 소식을 듣기 어려웠다. 여력이 없다거나, 자신의 아이가 내년에 대학을 간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난처해했다. 해주고 싶어 했지만, 신용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우리 딸이 의전원에 합격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으니 확인해보라는 소리도 들었다. 우리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을 때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다 이해가 갔다. 아빠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를 써 보았는데 영 길이 보이지 않았다.
딸은 딸대로 나는 나대로 한국의 여러 장학 재단들을 다 살폈다.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지원하는 경우는 있어도 의료를 공부하는 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이 되려니 해서 일찍 알아보지 못한 까닭에 날짜가 지난 경우도 있었다. 딸은 의전원에 입학하기 전 마지막 여름을 한국에서 보내려는 계획을 포기했고, 어쩔 수 없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보증문제가 해결되거나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에 올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딸은 의대 학장과 총장한테까지 메일을 보내면서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장학금을 줄 수 없는지 물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부학장과 미팅까지 했다. 사실 외국인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의사 공부를 시켜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이미 장학금 프로그램의 배분이 끝난 상태여서 뭘 더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학장은 그런 사정을 우리 딸에게 설명했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는 길을 알아는 보겠다고 했다. 딸은 막막해진 상황에서 등록금 때문에 1년을 꿇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올해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내년에도 입학 허가를 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딸이 보기에 부모인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딸은 자신의 부모를 자랑스러워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딸의 주변에 있는 유학생 친구들의 부모 중에 우리 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등록금 걱정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평균적으로 본다면 분에 넘치는 공부를 하고 있고, 자기 부모 주변에 자신 만큼 학비를 많이 쓰는 경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에게는 무리이고 넘치는 일이 아이가 속한 사회에서는 부족한 것이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대물림이 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처지에 맞지 않는 꿈을 꿀 때 발생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딸은 슬퍼했지만, 우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등록금 납부 날짜가 다가와 불안이 심해지던 어느 날, 아빠의 먼 친척으로부터 보증을 서 주겠다는 답을 받았다. 딸의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는 친척 할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 쪽에서 살고 있었다. 그분은 딸이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외국인이 의전원 입학 허가를 받은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고 하셨다. 중간에 그분의 자식들이 보증서는 일을 우려하면서 아빠의 공장에 근저당 설정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하튼 딸은 무사히 등록을 하고 그토록 염원하던 의전원에 입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