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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08.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4.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

   ‘일단 해봐’ 정신은 입시 외에도 다양하게 쓰였다. 딸의 도전과 모험의 여정에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우리의 경제적인 형편에서야 딸에게 보내는 돈이 무리하고 과중한 학비 지원이었지만, 미국 유학생 집단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편이었기에 딸은 TA나 멘토, 기숙사의 학생관리자 같은 역할을 찾아 열심히 용돈 벌이를 했다. 우리는 경제적인 마인드와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좀 고되어도 이런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딸은 대학 합격을 하고 입학 전 한국에 나와 있을 때,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인 한국 아이들의 과외 선생님과 미국 수능 준비 학원에서 보조 선생님을 열심히 했다. 한국에 나와 있는 기간에 할 일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실컷 놀고도 싶을 텐데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딸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미국 수능 학원 보조 선생님의 경우는 시간 대비 수입이 너무 적어서 말렸지만, 아이가 한국인 유학생이 적은 지역의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면서 굳이 보수가 적어도 이 일을 하겠다고 했다. 덕분에 딸에게는 이후 삼총사가 된 친구들이 생기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딸은 또 다른 도전을 했다. 그것은 랩실에 들어간 일이다. 한국에서는 학부생이 랩실에 들어가는 것이 흔지 않은 일이다. 보통 4학년이나 되어 대학원 진학을 확정지었을 때 들어가거나 대학원에 입학한 후 들어가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의 경우도 좀 빠를 수는 있지만, 1학년부터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1학년은 어느 나라나 대학의 낭만을 좀 경험하려고 하는 시기다. 우리 딸이 다녔던 학교는 미국에서 파티 스쿨로 1위라고 알려진 곳이다. 당연히 흥청망청 노는 분위기가 좀 있었다. 딸이 1학년 때는 기숙사에 있는 딸이랑 통화할 때마다 거의 늘 사이렌 소리가 들려 나는 여러 번 긴장했었다. 딸은 과도한 파티 문화로 경찰차가 거의 매일 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 딸은 이미 계획이 다 있는 아이였다. 초기에 몇 번 놀고 나서는 딱 끊고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


   딸은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관심 의료 분야의 랩실 문을 두드렸다. 랩실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때 이른 시기인 1학년으로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딸을 미국 교수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딸은 미국 연구실에 들어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한국의 의대 연구실의 연구 분야를 조사하고 관심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는 교수님을 찾아내어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메일을 썼다. 한국의 교수님은 우리 딸을 독특하고 재미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교수님은 우리 딸에게 답장을 보냈고, 우리 딸은 그 후 방학이면 서울의 한 의대 연구실에서 줄곧 지내게 되었다. 

   두 교수님 모두 대학 1학년에 막 입학한 아이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그래 와서 구경이나 해봐라’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도 학부생들과 일을 해봤지만, 대학 1학년일 때는 아직 어린애 티를 못 벗은 경우가 많다. 특히 공부만 하고 산 아이들의 경우 부모의 지원을 많이 받아 곱게 커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도 많다. 그 두 교수님들도 우리 딸의 과도한 적극성은 곧 사그라들 줄 알았을 것이다. 똘끼 충만했던 아이가 연구라는 일의 특성인 고되고 지루한 과정을 끝까지 겪어낼 것이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연구실의 일은 사실 연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잡다한 실무적인 일이나 심부름도 연구실의 막내로서 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 딸은 공부보다 일을 더 잘한다. 내가 생협 임원을 할 때는 엄마의 일을 도와준다고 간식 봉사 활동만 한 것이 아니다. 급할 때는 와서 순서지도 돌렸고, 온갖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엄마가 학위 과정 중 학교의 상근 업무를 할 때는 일부러 와서 통역도 했고, 행사 준비나 여러 가지 보조 업무를 많이 도와본 아이였다. 당연히 딸은 실무적인 일도 잘 처리했다. 그러면서 랩의 연구에 참여하여 성실하게 하나씩 배워나갔다. 


   기초 데이터로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고, 수많은 참고문헌 자료들을 조사해서 요약해내고, 패널이 되어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분석 자료를 글로 만들고 논문을 쓰는 일을 차근차근 익혔다. 코로나19로 1년간 휴학을 했을 때와 대학원 입학 전 1년간은 온전히 연구원으로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기도 했다. 휴학했을 때는 한국의 연구실에서 대학원 입학 전에는 미국의 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했다. 대학생 연구원은 아무래도 수입이 많지는 않지만, 스스로 정규수입을 벌어본 시간이었고 눈에 띄는 연구 성과도 있었다.


   투자한 시간과 세월은 무시 못 하는 것이라서 우리 딸은 대학 졸업 전에 학부생인데도 어느덧 랩실의 왕고참이 되어있었다. 보통 학부생 연구 참여자는 논문 저자 중 맨 끄트머리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흔한데, 우리 딸의 경우는 달랐다. 석박사 학생들보다 더 오래된 경험과 많은 연구 경력, 더 많은 참여 지분으로 1저자나 2저자로 이름을 올린 경우도 있었고, 결국 대학 졸업 전 미국과 한국 양쪽을 합하여 총 5개의 논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딸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니 미국에 있는 대학의 연구실을 기웃거리고 미국의 교수님에게 좀 들어가게 해달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의 연구실에 들어간 것은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딸에게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한국 교수님한테 메일을 쓸 생각을 했냐고 물었었다. 딸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메일을 썼지, 아는 사람이면 전화를 했겠지.”라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면서, 아마도 그 교수님이 답을 주지 않았으면 누군가 답을 줄 때까지 다른 연구실의 교수님에게 또 메일을 썼을 거라고 했다. 


   딸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다가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입학하기 전에 그 대학에 다니는 사람에게 정보를 묻고, 의전원에 간 사람을 찾아 의전원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고, 여러 의전원의 정보를 조사하고 그곳에 다니는 사람을 찾아 메일을 써서 물어보는 일을 일상적으로 했다. 일일이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그 와중에 거절이나 무응답의 경험도 얼마든지 많았다. 의전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른 대학의 연구실을 경험해보려고 했었는데 잘 안되었다. 실망스러웠던 거절의 경험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딸은 그 정도의 일로 좌절하지 않는다. 그저 될 때까지 도전해보자는 생각이란다. 그리고 이제 하버드와 존스홉킨스의 의대 교수에게 또 메일을 보낸다. 뛰어난 머리여야 하는 게 아니다. 저 집요함이 아이가 한 단계씩 발전하는 데에 가장 큰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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