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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07.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3. 딸을 믿어주고 지원해준 사람들

  

   우리 모녀의 꿈을 향한 도전과 고난 극복의 성공에는 우리를 믿고 지지해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외롭고 힘든 순간, 자신도 자신을 믿지 못할 때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재목인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왔는지, 인정해주고 다독였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영혼이 담겨있는 칭찬이면 좋겠지만, 영혼 없이 그냥 던지는 말이라도 대체로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하물며 말뿐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딸의 가장 큰 지지자는 아빠

   우리 딸에게는 아마도 엄마와 아빠가 가장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자신의 지지자였을 것이다. 내 도움과 교육 방식이야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 있으니 여기에서는 일단 넘어가고, 우리 딸에게는 아빠가 가장 큰 백그라운드였고 지지자였다. 우리 딸이 미국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1년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계속 미국에서 다니고 싶다고 자신의 결심을 밝혔을 때, 아이의 아빠는 항상 딸의 편이었다. 열여섯 어린 딸을 둔 아빠로서 대단히 진취적이었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담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아이 아빠는 인생이란 어차피 돛 하나 달고 홀로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살아가다 보면 알겠지만, 인생 전체가 도전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 도전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무수한 고난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같이 있어 줄 수 없는 것이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용감하게 도전하겠다는 딸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힘든 길이지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모 품 안에서 편안하게 성장하는 것보다 더 크고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었다. 후에 딸은 아빠의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고 하면서 눈물지었다. 


   사실 당시에 우리는 자기 소유의 집도 없었던 형편이었다. 자식이 원하는 만큼 사교육을 조금 지원해서 국내 대학에나 보내면 딱 알맞을 만한 경제적인 상황에서 아빠의 결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그즈음 아빠의 사업이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해서 경제적으로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비용을 부담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저 한국에서 교육시키는 것보다 부담이 더 될 것이라는 정도만 예상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로서도 용감한 도전이었다. 딸의 도전을 응원하는 멋진 아빠 노릇을 하고 나서 그 뒷감당을 하느라 결국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의 학비를 지원하면서 허리가 휘었지만, 딸은 마침내 아빠의 고생을 아빠의 자부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두 번째 엄마인 앤드리아

   아빠 외에 우리 딸의 가장 큰 지지자는 단언컨대 앤드리아였다. 우리에게 큰 은인이며 이제는 가족과 마찬가지인 앤드리아는 딸 학교의 영어 선생님이었다. 우리 딸을 앤드리아가 맡게 된 시기는 홈스테이로 한 아이를 돌보다가 그 아이가 떠나면서 아이를 돌보는 게 너무 힘들어 다시는 홈스테이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가 우리 딸이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한 학기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그녀는 영어 선생님으로서 우리 딸과 수업에서 만났을 때 대화가 잘 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딸의 사정을 알게 된 후 앤드리아는 안타까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갑자기 딸을 떠맡겠다고 나섰다. 

   앤드리아는 우리 딸과 띠동갑이다. 우리 딸이 당시 만 열여섯 살이었으니, 앤드리아도 고작 스물여덟 살로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아직 어리게만 보였다. 그러나 이해심과 배려심,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수용적 태도는 아주 훌륭하여 문화적으로는 닫힌 세계에 살고 있는 나보다 훨씬 열려 있고 어른스러웠다. 앤드리아는 당시 이모와의 불화와 결별로 불안과 혼란 속에 놓였던 우리 딸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한 아이돌 그룹의 팬이었던 우리 딸과 K-pop을 같이 듣고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한국 문화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드라마 도깨비와 힐러를 보고 나서 공유와 지창욱의 팬이 된 앤드리아는 K-pop을 들으면서 빅뱅의 열혈 팬이 되었다. 시작은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이었지만, 앤드리아가 한류의 덕후가 되면서 우리 딸은 한국에서도 해보지 못한 아이돌 콘서트 관람을 다 해보게 되었다. 비행기까지 타고 시카고나 LA까지 가서 빅뱅 공연을 보고 와서는 이제까지 자신이 좋아했던 아이돌 공연을 못 본 것을 안타까워했다. 한 번도 연예인을 좋아한 적이 없어서 이해력이 부족한 엄마 탓에 앨범과 굿즈 사 본 것이 전부였기에, 딸로서는 앤드리아가 한류 덕후가 된 것이 신나는 일이었다.


   또 한류 덕후뿐 아니라 앤드리아는 한식 매니아가 되었다. 미국 사람들은 생각보다 요리를 별로 하지 않는다. 아침은 시리얼이나 간단한 토스트 정도를 먹고, 점심은 회사에서 먹고, 퇴근길에 포장된 음식을 사서 저녁으로 데워 먹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나 우리 딸은 밥 먹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생협 임원까지 한 엄마는 김치를 세 가지씩 담그면서 살았고, 명절이면 집에 손님들이 와서 딸도 너댓 가지의 전쯤은 혼자 맡아서 부칠 정도였다. 또 중학교 때부터는 엄마를 따라 지역아동센터에 간식 봉사를 다닐 정도로 요리에 대한 부담도 없었으니, 미국식 식사 문화를 못 견디고 딸은 직접 밥을 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사실 한식은 외국 사람들이 볼 때 냄새가 많은 편이다. 보수적인 앤드리아의 엄마가 앤드리아의 집에 방문할 때 두 사람은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작업을 미리 해둬야 한다. 앤드리아 엄마가 김치와 된장 냄새에 기절할뻔해서, 딸도 눈치를 보느라 마음을 졸였다고도 했다. 그러나 앤드리아가 적극적으로 수용해준 덕분에 앤드리아의 주방에서 딸은 가끔 카레와 된장찌개, 제육볶음과 김치볶음밥 등을 한 번씩 직접 조리했고, 축제 때는 수백 명분의 음식이 그 주방에서 제조되기도 했다. 나중에 된장찌개는 앤드리아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앤드리아가 한국에 와서 우리 집에 머무를 때 된장찌개에 알타리 김치를 너무 맛있게 먹고, 감자탕 맛에 감동 받는 것을 보고 전생에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우리 딸이 아무리 영어를 잘했어도 한국에서 익힌 영어 실력이었다. 부족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앤드리아는 영문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까지 있는 선생님이었다. 친절하고 사려깊은 앤드리아는 딸의 부족한 영어 모음 발음을 교정해주었고 글을 쓸 때마다 문법이나 문장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을 가르쳤다. 의문점이 있거나 애매한 것이 있을 때마다 바로 물어보고 교정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우리 딸에게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나이 차가 많지 않아 대하기 어렵지 않았고, 늘 우리 딸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딸은 자신의 여러 가지 고민과 진로에 대한 상담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딸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앤드리아와 그녀의 남편인 리는 딸의 짐을 직접 실어다가 대학 기숙사에 넣어주었다. 대학 졸업식과 의전원 입학식에도 앤드리아는 늘 가족의 자리에 있어 주었다. 한국이라면 내가 응당 해야 하는 많은 일을 우리 딸의 두 번째 엄마인 앤드리아가 늘 도맡아서 했다.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때에 미국 사람들도 명절에 귀향하는 우리나라 사람처럼 귀향을 한다. 딸은 그럴 때면 앤드리아의 집으로 간다. 앤드리아의 부모님마저 우리 딸을 이제 어느 정도는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앤드리아는 우리 딸이 의전원에 입학했을 때, 자기 인생의 중요한 과제 하나를 끝낸 것 같다고 기뻐했다. 나는 그녀한테 아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딸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그 외에도 딸을 응원하는 많은 어른이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친구들인 많은 이모, 삼촌들은 딸의 도전을 늘 격려하고 응원했다. 방학에 한국에 나올 때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서 용돈도 주고 밥도 사주면서 늘 딸의 도전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말해주었다. 부유하지 않아 장학금을 받아야만 하고, 대학에서도 용돈벌이를 위해 TA나 멘토 역할을 하면서 애쓰는 우리 딸에게 너는 어릴 적부터 특별했으니 너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칭찬하는 그분들의 말에 우리 딸은 늘 많은 힘을 얻었다. 


   또, 병원에서 체험 활동을 하도록 도와준 분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진로를 준비하면서 이런 체험을 하는 일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성적으로만 의대에 가기 때문에 미리 병원에서 경험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아무리 적극적인 아이이고 뭐라도 도우려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아이라고 해도 병원에 아이가 와 있으면 불편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고 때로는 성가실 수도 있지만, 흔쾌하게 허락해준 분들 덕분에 딸은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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