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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Mar 07. 2024

딸은 의전원, 엄마는 박사: 극복 모녀의 도전 스토리

2. 안 된다고 했던 순간들


   우리 딸은 진학을 고민할 때마다 늘 사람들에게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의전원에 진학하려던 순간에는 그런 부정적인 말들 속에서 매번 끊임없이 용기를 내야 했다. 실제로 많은 도전은 실패의 연속이기도 했다.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때로는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인해 좌절했고, 때로는 2% 부족했던 노력에 대해 후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엄마로서는 좀 매정하도록 솔직한 편이다. 아이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 우쭈쭈를 하거나 실패의 원인을 남 탓, 환경 탓으로 돌리는 일은 거의 없다. 냉정한 분석이 다음 도전의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분석은 후회 없는 노력과 용감한 도전 후라야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다. 나는 언제나 딸의 도전을 응원했지만, 딸에게 목표를 높게 잡았으면 목표만큼 더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꿈은 한없이 원대한데, 남들만큼만 노력한다면 결코 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라는 게 나의 계산법이었다. 꿈꾸지 말고 포기하라고 하는 대신 꿈꾸고 그 꿈만큼 노력하라는 것이다. 꿈만큼의 노력이라는 것은 사실 죽을 둥 살 둥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실패의 순간에는 위로와 슬픔을 나누기보다 냉정한 분석을 하다가 딸의 눈에서 눈물을 더 빼는 일이 허다했다.     


   특히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딸이 자신이 가고 싶었던 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을 때 나는 좀 더 냉정해졌다. 목표를 낮추던지 노력을 더 했어야 했고,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더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의대라는 꿈은 너무 멀었고, 의대에 가기에는 딸의 수학과 과학 성적이 충분히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에 다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딸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았던 때가 있었다. 한번은 독하게 수학 문제집 10권을 풀고 시험을 보러 갔었다. 우리나라의 시험이라는 것이 과학고에 갈 4%의 아이들을 위해 변별력을 만드느라 문제를 어렵게 내기 때문에, 그 범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성적을 얻기 어렵다. 풀기 어렵고 풀 수도 없는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능수능란하게 풀어내야 하는 시스템은 결국 많은 수포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나친 긴장과 성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시험 공포증이 생긴 것은 아닐까 의심할 만큼 노력에 비해 딸의 성적이 좋아지지 않았다. 만족할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 해본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딸이 최선을 다 해보았으므로 목표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간호대, 교대, 약대 등 여러 가지 의견을 내비쳤으나, 딸은 그 후에도 목표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딸이 갑자기 미국에 가겠다고 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미국으로 가서 새롭게 도전하겠다는 말이 나로서는 좀 충격적이기는 했다. 외국 유학을 쉽게 결심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많지는 않았기에 처음에는 물정 모르는 아이의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랬더니 딸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들고 나왔다. 

   미국 국무부에서 하는 문화교류 차원의 중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비용은 당시에 천삼백 만원 정도로 1년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그 정도 비용이면 대입을 위해서 고등학교 영어, 수학 사교육비를 모두 쓰는 경우에 들어가는 비용과 큰 차이가 없고 자사고를 가겠다고 할 때의 비용을 더하면 오히려 싸다는 생각에 애들 아빠와 본격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다녀오느라 딸이 한 1년 정도 진학을 늦춘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는 것보다 살면서 한 번쯤 모험과 도전을 해보는 것은 앞으로 딸의 인생에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아이 아빠는 우리 때와 다르게 딸이 삶의 공간을 나라를 넘어 확장하여 사고하는 데 대해 지지하면서 격려했다. 그러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이모가 어린 여학생에게 위험한 도박이라며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해보겠다는 도전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미국으로 갔다. 처음 반년 동안은 이모에게 가서 지내게 되고 나중에는 영어 선생님인 앤드리아 집에서 숙식하며 나머지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우리 딸은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비교과 활동과 봉사 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빛을 보기 어렵다. 다재다능한 아이보다는 책상에 오래 붙어 앉아 집중하는 능력이 입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학업 외에 다른 것과 나누는 아이들은 성적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하다 못해 교내 대회에서도 진로와 성적을 확인해서 상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스펙 몰아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아이들이 갖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우리 딸도 그런 경험을 하긴 했고 꽤 억울하게 생각했었다. 아이들과 어울려서 기획하고, 조직하고 일을 꾸미는 데에도 소질이 있는 우리 딸이 미국에서 날개를 펼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언젠가 다니던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열린 다문화 행사는 아이의 저력을 그대로 보여준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딸이 닭갈비, 불고기, 잡채 등을 100인분씩 만들어내어 한국 부스를 인산인해로 만든 일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가 있었던 곳은 동부나 서부 지역에 비해 한국 사람들이 적은 중부 지역이었는데 딸은 그 행사에서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알리는 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딸은 그런 비교과 활동뿐 아니라 교과 활동에서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최상위 그룹에 속하지 못했던 수학 실력은 미국에서는 학교를 대표하여 경시대회에 나갈 만큼의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영어는 한국에서도 학교 대표로 스피치 대회에 나갈 만큼 원래 잘해서 처음부터 미국으로 갈 생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에세이 대회에도 나갈 정도로 적응도 빨랐다. 미국에서 딸은 특유의 끼와 적극성 때문에 여러 면에서 금방 두각을 나타냈고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오해받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실패이며 딸에게 첫 번째로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을 들었던 때라면, 대학입시가 그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대학을 염두에 두고 딸을 미국으로 보냈던 것이 아니었고, 딸이 1년간 낯선 곳에서 살면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랐다. 옛 유럽 귀족의 자제들처럼 그랜드 투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 생활 1년의 기간이 자양분이 되어 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 따라서 진학에 대한 계획과 대책을 면밀하게 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긴 여행 정도로 생각했다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아이의 다양한 재능이 잘 발현되는 것을 보고 계속 머물게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경제력과 무관하게 어찌어찌 상황에 끌려갔다고나 할까. 


   그런데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 대학은 등록금이 아주 비싸다는 것이 그 문제였다. 학교마다 천차만별인데 주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는 주립대학교가 사립대학교에 비해 대체로 저렴한 편이고 지역마다 또 각각 다르다. 사립대학교는 1년 학비가 기숙사비나 임대료와 용돈을 포함하면 거의 억- 소리가 날 수도 있는 정도다. 또 외국인과 내국인도 학비를 다르게 받는데 내국인에게는 훨씬 싸다. 우리는 사립대학교 학비를 자비로 감당할 정도로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라면 큰 걱정 없이 대학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중산층 수준이었지만, 미국 대학을 쉽게 보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니 우리는 당연히 딸에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야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미국 대학 학비의 현실을 잘 아는 주변에서는 딸에게 장학금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중국이나 사우디 학생들이 미국에 많이 몰려오는데 이 친구들은 돈을 많이 내고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학 입장에서 보면 부유하고 똑똑한 아시아 학생들이 넘치도록 많은데 굳이 장학금을 제공하면서까지 우리 딸을 데리고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입시 원서를 낼 때 장학금(재정지원) 신청서를 같이 내게 되어있다. 그런데 막 입시 원서를 여기저기 넣어야 하는 딸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 아무 곳에서도 돈 없는 널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말은 엄청나게 맥이 빠지고 어느 정도는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그들은 등록금이 싼 주립대학이나 커뮤니티 칼리지를 알아보라고 넌지시 말해서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봉사하면서 스펙을 만들어 놓았던 우리 딸을 몹시 슬프게 했다.


   딸이 가장 가고 싶은 대학은 미국 대학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 사립대학교였다. 우리 딸의 경우 봉사 활동, 동아리 활동, 수상 실적 같은 스펙은 충분했고, 내신 성적도 좋았다. 대입 시험이 관건이었다. 미국은 대입 시험을 1번만 보는 게 아니라 1년에 예닐곱 번을 볼 수 있다. 딸은 정보를 통해 그 대학에 입학할 만한 점수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고 그 성적을 달성했다. 나는 일단 점수가 목표치에 이르렀어도 딸이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약점이 있으니 한 번 더 시험을 치러서라도 성적을 조금 더 올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 딸이 보기에 자신의 점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었지만, 더 보지 않았다. 


   미국 대학은 정해진 커트라인이 없다. 인종과 지역, 학생이 해온 다양한 활동 등 모든 조건을 종합적으로 살피기 때문에 합격자들의 점수 편차가 크다. 그래서 대체로 흑인들은 점수가 평균보다 낮은 경우가 많고 아시안은 평균보다 높은 경우도 많다. 인종 고려 때문에 평등성을 해친다는 의견과 법원 제소 등이 뉴스가 된 적도 있다. 이는 딸이 예상 점수를 얻었어도 얼마든지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장학금을 신청했기 때문에 떨어질 확률은 더 올라간다는 뜻이다. 나는 성적을 최대로 끌어올리지 않고 멈춘 딸이 불안했고, 내 예상대로 그 학교는 떨어졌다. 아시아계가 아닌 경우라면 합격하기에 충분한 조건들이었지만, 아시아계 외국인에다가 장학금까지 신청했을 때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가고 싶어 했던 학교에서 합격 통지를 받지 못해 우리 딸은 엄청 슬퍼하고 좌절했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여러 명문대학에서 장학금 없는 합격을 받았고, 두 곳의 대학에서는 그토록 바라던 장학금 제안이 들어왔다.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제안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장학금을 많이 주겠다는 학교가 명문 의전원이 있는 학교였기에 딸이 두 번째로 가고 싶어 했던 학교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는 한숨을 돌렸고, 결국 주립대보다 적은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우리에게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 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학부에서는 의대가 없고 로스쿨처럼 학부를 졸업한 다음 의전원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딸이 의전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절대로 불가능한 얘기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백프로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의전원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왜 남들은 굳이 필리핀이나 헝가리를 가겠냐고 하였다. 심지어 합격하고 난 다음에도 우리 딸의 합격 사실이 거짓이 아닌지 확인해보라는 말도 들었다. 미국에서 사는 지인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는 10년 동안 외국인이 의전원에 들어간 경우가 없다면서 그럴듯한 근거도 제시했다. 


   미국 의전원에서 웬만해서는 외국인을 뽑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의사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든다. 따라서 의전원은 등록금이 비싸기도 하지만, 등록금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국가의 여러 가지 지원이 필요하다. 지난 코로나19 사태로 의사 한 명의 소중함을 전 인류가 알게 되었다. 전염병뿐 아니라 고령화와 비만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이 점점 많아져서 세계적으로 의사의 수요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미국에서도 의사는 인정받는 직업이라서 소득도 높기에 경쟁이 상당하다. 

   미국 대학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의전원에 지원하는 우수한 지원자가 많은데 굳이 많은 돈을 들여 미국 사람이 아닌 외국인을 뽑아 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국계는 많아도 10년 동안 지역에서 한국인이 의대에 진학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의사인 내 친구는 미국에 교환교수로 다녀와서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간호사 처우가 좋다며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우니 간호사로 진로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조언하기도 했다. 


   이런 수많은 조언과 부정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전혀 없는 일은 아니므로 우리 딸은 도전하고 싶어 했다. 의전원에 가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4년 내내, 아니 코로나19로 1년 휴학했던 시기에도 여러 가지 스펙 준비를 했으니 거의 5년 내내 의전원에 가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우리 딸의 친구 중에는 치과의사가 되는 코스인 치전원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의전원보다 치전원 입학이 훨씬 수월해서 나도 딸에게 안정적으로 치전원을 준비하는 것을 권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의전원 입학을 위해서는 학부 내신 성적, MCAT(의전원 입학시험) 준비, 의료 계통 체험 활동, 봉사 실적, 연구 실적 등등 어느 하나 만만한 일은 없었다. 딸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5년간 경주마처럼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수가 믿어주지 않았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던 의전원 합격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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