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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훤림 Apr 04. 2024

넌 그러니? 난 이런데!  09

이성문제 두 번째

17. 언제부터 사귀는 거야?     



엄마: 너 지난번에 누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니?


딸램: 그냥 썸 탄 거야. 사귀는 것 아니야.


엄마: 손잡고 영화 봤다며?



딸램: 고려 시대야? 누가 손잡고 영화 보면 사귀는 거래?


엄마: 안 사귈 거면, 손은 왜 잡아?


딸램: 사귀어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지.


엄마: 그럼 언제부터가 사귀는 건데? 키스하면 사귀는 거야?


딸램: 아니.


엄마: 그…럼 한 이불 속에 들어가야 사귀는 거야?


딸램: 아~니.


엄마: 그러면 도대체 언제가 사귀는 건데?


딸램: 우리 오늘부터 사귀자 그러고 오케이 땅땅, 하면.


엄마: 말도 안 돼.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그렇지. 결혼도 아니고 사귈 것도 아니면서 같이 잘 수도 있다는 거야? 무책임하게.



딸램: 왜 같이 자면 책임져야 해. 책임진다는 게 뭔데. 왜 사귀거나 결혼해야만 같이 자야하는 건데? 그걸 누가 정한 건데?


엄마: 사람마다 윤리나 가치관이 다를 수 있지. 연애나 결혼에 대한 의미, 책임과 의무에 대한 규정도 다를 테고, 세대나 연령별로도 그 편차는 더 클 거고. 그런데 문제는 둘 사이에도 감정의 편차가 다를 수 있잖아. 


딸램: 그러니까 사귀는 건지 아닌 건지 분명히 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야. 입뒀다가 뭐해? 


엄마: 어떤 책임에 대한 명확한 정리를 통해서 합의 하에 거기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고정된 것이 아니니까. 합의하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에 대해 예상 못했던 일들과 마주칠 수 있어. 그런 상황 속에서는 합의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 되기 마련이거든. 뉴스에 나오는 치정 범죄들이 왜 그렇게 많이 나오겠니?


딸램: 그건 개인적인 문제지. 몇몇 이상한 사람들이 벌이는 말도 되지 않는 범죄 때문에 연애와 결혼이 왜 규정되어야 하냐고. 


엄마: 사귀자 땅땅! 말하지 않아도 손잡고, 키스하고, 같이 자면 상대방은 사귀는 거라고, 두 사람이 이제 어떤 약속과 규정 속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딸램: 요즘은 안 그래. 다양한 단계와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어. 중요한 것은 오히려 거짓말 하지 않고, 느끼는 부분을 공유하고, 서로에 대해 성실하게 명확한 입장을 표현하는 거야. 어떤 접촉이라도 접촉과 동시에 사귀는 거라고 생각하면 엄마, 정말 꼰대되는 거야.


엄마: 관계에 대한 책임은 안 지고, 책임감 없는 단맛만 맛보겠다는 것이 요즘 스타일이라는 소리로 밖에 안 들려.


딸램: 엄마, 제발 어디가서 진보라고 하지 마. 정치적인 입장 외에 모든 부문에 있어서 엄마의 생각은 대부분 보수야.          



18. 외로워     



딸램: 이번 여름엔 연애를 해야겠어. 연애도 없이 20대 초반을 이렇게 보내는 건 너무 억울해.


엄마: ….


딸램: 왜 아무 말도 없지?


엄마: 기가 막혀서.


딸램: 내가 연애를 좀 해봐야겠다는데 왜 기가 막히지?


엄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그건 그냥 썸이다? 도대체 연애는 뭐가 다른데?


딸램: 안 해봐서 모르지. 그래서 해보려고.


엄마: 그냥 네가 한 것, 그게 다 연애야. 간질간질하다가 뜨끈뜨끈하다가 끈적끈적하다가 질척질척하다가 심드렁해지는 과정을 다 겪어내지 않고, 넌 매번 간질간질만 하다가 초반에 끝낸 거고. 


딸램: 어쨌든 본격적인 과정은 시작도 안 해봤으니까, 안 해본 거나 마찬가지야.


엄마: 괜찮은 애인지 아닌지, 친구로 오랫동안 찬찬히 살펴보고 사귀어. 충분히 겪어보지 않고 덥석 시작하니까 금방 끝나게 되는 거야.


딸램: 천천히 알아보기에는 내가 너무 외로워. 그리고 썸을 타 봐야 괜찮은 애인지 아닌지 알게 되는 거지.


엄마: 남자로는 싫어도 친구로는 괜찮은 애도 있을 수 있는데, 썸을 타고 나면 친구로 남기 어렵잖아. 


딸램: 난 썸 탔던 애랑도 친구 할 수 있는데?


엄마: 대단하셔!


딸램: 그런데, 엄마는 안 외로워? 슬슬 연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엄마 재혼하는 거 난 적극 찬성인데.



엄마: 외로움은 인간의 기본값이야. 인간이면 누구나 외로운 거니까. 극복하는 게 아니라 가지고 가는 거야, 평생토록. 


딸램: 그러니까….


엄마: 그리고, 오히려 옆에 누가 있을 때가 더 외로울 수도 있어. 옆에 누가 있어서 안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야. 때로는 없을 때 외로운 것보다 있을 때가 훨씬 더 많이 외로워. 그래서 연애고 결혼이고 난 하고 싶지 않아.


딸램: 그러면 결혼은 하지 말고, 연애만 하면 되지.


엄마: 공부하랴, 돈 벌랴, 애 키우랴, 부모 봉양하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 무슨 연애? 귀찮아. 연애하느라 감정 소비하고, 에너지 소비하기 싫어. 나한테는 그게 명품 가방보다 더 사치스러운 일이야.



딸램: 그럼 인생이 너무 쓸쓸하고 슬프잖아.


엄마: 네가 몰라서 그렇지. 연애말고도 인생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스펙터클해. 난 연애하는 것보다 애 키우는 것이 더 재미있고 짜릿했고. 남자 좋아 봐야 몇 년이지만, 애 예쁜 것은 훨씬 오래가고. 남자 알아가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훨씬 흥미진진하고. 인생이 쓸쓸하다고 느끼기에는 예상외의 반전이 곳곳에 숨어서 뒤통수 치기가 일상이라 연애따위에 신경쓸 여지도 없고.


딸램: 들으면 들을수록 더 쓸쓸하고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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