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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Nov 16. 2020

그들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아래에

영화 <방가? 방가!>가 갖는 의의와 한계


영화 <방가? 방가!> 포스터


반가워요, <방가? 방가!>

   1980년대 후반 노동 환경과 임금의 수준이 개선되며 값싼 노동력이 부족해진 3D업종의 영세업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그 시간동안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여러가지 갈등과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그린 영화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그 중 2010년 개봉한 <방가? 방가!>는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사는 세상을 주요 배경으로 삼아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그려 낸, 제목만큼 반가운 영화이며, 이주노동자를 다룬 영화 중에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완득이>와 더불어 거의 유일하게 대중성을 지닌 작품이다.



영화가 반영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

   영화는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다양한 장면 속에 사실적으로 녹여 낸다.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와서 가장 처음 겪는 어려움인 열악한 근무 환경은 주인공 ‘태식’이 취업난에 시달리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으로 위장 취업을 시도했던 과거로 플래시 백 할 때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베트남 사람으로 취업했을 때에는 더운 곳에서, 몽골 사람으로 취업했을 때에는 추운 곳에서, 심지어 네팔 사람으로 취업했을 때에는 높은 곳에서 일해야 했는데,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은 힘들거나 위험한 곳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현실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러한 환경을 견디고 일을 하더라도, 근무지에는 차별과 부당 대우라는 더 큰 산이 있다. 영화는 태식과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의자 공장에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를 같은 공간에 배치하되 그들이 받는 대우를 대조적으로 그려 내어 그러한 차별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공장 사장은 이주노동자들에게 같은 곳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받는 급여의 절반 수준만 주고, 업무량이 많을 때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퇴근하게 하고 이주노동자들에게 초과 업무를 준다. 심지어 사장은 이주노동자들의 급여를 적금을 들어준다는 명목으로 가로채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노동자로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불법체류자들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덧붙여 공장 내 유일한 여성 이주노동자인 ‘장미’는 사장에게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하지만, 그 역시 불법체류자로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고, 그와 그의 아들의 경제적 생존이 사장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한다.

   이주노동자들은 근무 환경과 조건 외에도 여러 면에서 차별을 겪는다. 공장에서는 외국인과 한국인의 노동 공간이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배타성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식사 시간에 태식이 한국인 무리와 함께 앉으려고 하자 그를 부탄 사람으로 알고 있던 한국인들은 눈치를 주어서 그를 쫓아낸다. 이는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겸상을 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법도였지만 현재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규칙’과 함께 살펴볼 때,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은 근무지 내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인데, 이는 버스에서 고등학생들이 태식을 조롱하는 장면과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이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고등학생들은 태식을 이주노동자로 오인하지 않았으면 하지 못했을 행동과 언사로 그를 모욕하다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조롱을 그만둔다. 그저 이주노동자라는 것 자체가 차별과 무시의 유일한 빌미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종 차별은 이 고등학생들이 예외적으로 미성숙하고 어려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장성한 한국의 사회인이자 공무원인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직원들이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장미를 조사하던 직원은 그에게 ‘베트남 분이 참 미인이시네요’ 하고 언뜻 칭찬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을 건네지만 이는 베트남 사람들의 외모는 대체로 훌륭하지 못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또다른 직원은 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의 이름을 받아 적는 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뭐가 이렇게 길어, 씨’ 하며 불만을 드러낸다. 이에 조사받던 노동자는 직원의 이름을 묻고, 직원은 자신의 이름이 ‘육경룡’이라고 대답해 주지만, 노동자는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직원은 화를 내며 자신의 이름이 어렵냐고 묻는 상대주의적 사고가 결여된 태도를 보인다.

   영화 속에서는 차별 외에도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는 ‘이미그레이션’, 즉 불법 체류자 단속반이 뜨면 마치 불을 밝히는 순간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사라지는 바퀴벌레처럼 혼비백산하며 도망가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장미는 의도가 무엇이었건 자신을 두 번이나 성추행한 태식이 단속반(으로 분한 용철)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날 이후, 그를 용서하고 마음을 열 정도로 단속반에게 잡히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있어 큰 공포이자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반쯤’ 열린 가능성

   이주노동자들은 차별과 멸시를 당하고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존재를 감추고 살아야 했지만, 극 중에서는 그들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외국인 노래자랑으로, 이는 TV에 방송된다는 점에서 밤낮없이 단속반을 피해 숨어들고 있어도 없는 사람인 듯 살아야 했던 이주노동자들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자 수단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진행된 13번의 외국인 노래자랑에서 12번의 우승은 트로트를 부른 팀이 가져갔다는 태식의 말과 트로트는 뽕짝, 뽕짝은 한국인의 영혼이자 인생이라는 용철의 말에서,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은 한국적인 틀에 맞춰진 모습을 갖췄을 때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에게 ‘썩은 계란 치우라’며 그의 문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공장 사장의 태도와 맞물려 이주노동자가 한국 사회와 관계를 맺고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향의 문화를 버리고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동화’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낸다. 자신과 아들의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해서는 한국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장미의 말을 통해 또다른 존재 인정의 가능성으로 결혼이 제시되지만, 이는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결혼 이주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에게는 상당히 배타적이라는 것 또한 시사한다.



영화가 범한 오류

   영화는 관객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사회적 약자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을 무리하게 달성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어필하기 위해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를 다양하게 설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공장 사장과 직원, 용철, 버스 고등학생들에 덧붙여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직원들까지 모두 악역으로 뭉뚱그려진다. 비록 정책본부 직원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차별적인 언사를 하고 거칠게 행동하기는 하나, 그들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불법체류자들을 추방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공무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이주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도망치는 장면에서 한 직원은 잡았던 불법체류자를 의도적으로 놓아주기까지 하는데, 이는 영화 속에서는 인간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몽땅 가해자로 만들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처지에 동조하기를 무리하게 요구하는 장면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구속된 이주노동자를 석방시키기 위한 시위 장면이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영화에 삽입되었을 지 모르나, 극중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로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단속반이 뜨면 도망치기 바쁜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불법 체류 강력 단속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은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려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방해하고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슷한 맥락으로 태식이 공장 사장으로부터 이주노동자들의 밀린 임금을 받아 내기 위해 ‘한국에서 일 하고, 한국에서 돈 벌고, 한국에서 밥 먹고 살고 있으면 한국 사람’이라며 비약적인 말을 하고 이에 이주노동자들이 함성을 지르는 장면 또한 한국인 관객들의 공감과 동조를 얻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처럼 섬세하지 못한 인물 분류와 무리한 설정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한 영화의 현실감을 오히려 떨어지게 만들고, 이는 영화의 의도와는 달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이 문제의 본질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에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를 보는 시선으로부터 배타적 선입견과 왜곡된 프레임을 제거하고, 그들의 파편화된 인간성을 복원하여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극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행동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동료 이주노동자 석방 시위에서 그들은 분명히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와 절박하게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선 태식이 뜬금없이 구호를 시위와 관련 없는 노래 가사로 바꿀 때에 생각 없이 따라하고 심지어는 태식이 이끄는 대로 노래방에 가서 마른 안주에 맥주 시켜 먹고 정신없이 노는, 주체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덧붙여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투쟁할 때에도 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태식이 선봉에 서고, 태식이 하라는 대로 태식이 가르쳤던 욕을 따라 하는 모습에서 이주노동자들은 태식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이주노동자들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용철의 외침 ‘이미그레이셔어어어언!’에 또다시 빛을 피해 도망가는 바퀴벌레가 되어 사라진다. 이처럼 영화는 이주노동자들을 차별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파편화된 상태로 남겨 버리면서, 비판하고자 했던 문제점을 번복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만다.



크다 만 방태식

   영화 <방가? 방가!>의 주요 서사는 태식의 내적 성장 과정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용철이 운영하는 노래방의 매상을 올리기 위해 이주노동자를 이용하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질 나쁘다. 그는 노래자랑에 나가려는 동료 이주노동자들을 노래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들의 가장 큰 위협인 단속반을 거짓으로 꾸며 낸 뒤 제압하여 그들의 마음을 연다. 심지어는 이주노동자들이 구속된 이주노동자를 석방시키기 위한 시위에서 얼떨결에 선봉에 섰을 때에도 뜬금없이 구호를 노래 가사로 바꾸고는 시위대를 모두 노래방으로 이끈다. 단속반에 잡혀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안고 사는 불법체류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들이 정말로 시위를 한다면 그것은 생사가 걸린 위급하고 중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태식은 그런 사람들을 노래방 매출의 수단으로 삼아 버리는데, 이러한 행동은 이주노동자들을 값싸고 다루기 쉬운 노동력으로만 보는 공장 사장이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태식이 이주노동자들을 수단화하는 행태는 그가 체불되었던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을 받아내어 용철과 고향으로 도망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가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내면의 갈등과 용철과의 갈등이 폭발한 후 사라진다. 이후 태식은 비로소 이주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몸을 던져 그들을 지키고 구하는 데에 힘을 쏟으며 자신의 내적 성장과 성숙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하지만 태식의 한계, 나아가 이 영화의 한계는 이주노동자들을 모두 법무부에 불법체류자로 신고해 버린 용철에게 분노하며 하는 ‘동냥은 못 줘도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다’는 말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태식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이루었다면, 그는 이주노동자들을 이용하는 악행을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친구, 적어도 대등한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태식이 이주노동자들을 쪽박을 들고 구걸하며 동냥을 받아먹고 사는 거지와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는 의미로, 그들에게 동정심은 가질 수 있지만 자신과 동등한 위치로 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러나 마음 줄 수 없다는 그 말

   <방가? 방가!>는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코미디 장르의 특성을 활용하여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을 최소화한 재치 있고 똑똑한 작품이다. 또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동질성을 느끼기 힘든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에 한국인이지만 그들과 비슷한 처지로 사는 태식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줄이고자 한 시도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한국 사회 속에서 파편화된 이주노동자를 오히려 반복해서 파괴하는 방식으로 주인공 ‘성장’ 서사에 이용하며 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복원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영화 초반의 상황과 비교했을 때 이주노동자들은 의미 있는 변화를 겪지 못하고 여전히 주변화된 채로 엔딩 크래딧이 올라 가버리고 만다.

   열악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만, 한국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있다’고 대중에게 말하는 이 영화는 존재만으로도 유의미하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존재들과 대립하여 적극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 주어야 할 태식과 영화 자체의 서사는 오히려 그들을 동냥을 받는 존재, 즉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아래에’ 있는 존재로 고정해 버리고 만다. 한국 사회가 태식과 같이 이주노동자들을 끝없는 연민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면 결국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 평생을 가도 닿을 일 없는 평행선, ‘찬찬찬’의 가사처럼 이루어져 본 적 없이 이별한 상태로 남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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