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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Dec 31. 2020

진정한 성장이란 결국 '나'를 찾는 것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놀라 홈즈> 리뷰와 여성주의 시대극의 주의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훼손되고 억압당한 '여성의 자아 복구'는 최근의 미디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이다. 잘 만들어진 여성주의 작품은 평론가와 대중의 찬사를 얻기도 했지만, 고집 센 '여성'만을 앞세워 서사와 장치를 소홀히 한 작품들은 망작들이 으레 듣는 혹평보다 더 심한 악평을 견뎌야만 했다.

   다행히도 올해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놀라 홈즈>는 전자에 속하는 듯하다. 고전 명작이지만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현대의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차용하고, 새로운 캐릭터인 홈즈 가의 늦둥이 '에놀라'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주인공 에놀라의 성장 서사 또한 흠 잡을 데 없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엄마를 찾아 나선 에놀라가 엄마에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위기를 타파하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찾아 나가는 성장 여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놀라 홈즈>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는 에놀라

  자신이 나고 자란 '펀델 홀'을 떠나기 이전까지의 에놀라는 당차고 똑똑하기는 했어도, 완성된 주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엄마 '유도리아'는 에놀라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나 바깥세상에 대한 것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놀라의 두 오빠와 유도리아의 동료 '이디스'의 눈에 에놀라는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 아가씨에 불과한 것이다. 이 때문에 펀델을 떠난 에놀라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외부의 세상에서 온갖 위기를 마주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엄마에게 받은 교육을 통해 그녀를 위협하거나 곤란하게 하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읽은 수많은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 사건의 실마리와 해결책을 모색하고, 매일같이 단련한 주짓수로 괴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이처럼 에놀라는 그녀를 똑똑하고 강한 아이로 키우고자 했던 엄마의 교육 덕분에 험한 바깥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에놀라의 진정한 성장은 엄마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엄마의 흔적을 찾다가 튜스크베리가 괴한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놀라는, 어릴 적 벼랑 끝의 양을 구하려다 죽을 뻔한 그녀에게 '약자를 돕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네 목숨까지 위험하게 하면 안 되며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것도 있다'고 가르친 엄마를 떠올린다. 그러나 에놀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튜스크베리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 덕에 에놀라와 튜스크베리는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고, 튜스크베리가 상원 의원이 되어 선거법 개정에 결정적인 한 표를 행사하면서 에놀라는 엄마가 목표로 했던 선거법 개정을 간접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에놀라는 튜스크베리家 살인사건의 진범을 저명한 명탐정 오빠인 셜록보다 한 발 빨리 밝혀냄으로써 전도유망한 탐정, 암호 해독가, 그리고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하는 사려 깊은 한 명의 주체이자 진정한 그녀 자신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에놀라에게 '다른 사람 찾지 말고 자아를 찾아서 주체적으로 살라'고 했던 이디스의 충고처럼, 엄마를 찾기 위해 떠난 여정이 에놀라의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으로 탈바꿈한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이다.

   에놀라에게 엄마 유도리아는 말 그대로 그녀 세상의 전부이며 절대적인 존재였다. 또한 유도리아는 가부장제가 사회를 지배했던 20세기 초반의 영국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딸을 완벽한 신붓감이 아닌 주체적 지식인으로 키우고자 했던 혁명가로, 에놀라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눈에도 이상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엄마가 아무리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에놀라의 성장은 엄마의 가르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대신 주체적인 선택을 했을 때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에놀라는 엄마와 오빠를 앞지르기까지 했다. 이러한 부분을 통해 작품은 이상향과 완벽하게 같아지는 것 대신,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 성장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여성주의 시대극의 주의점

   이처럼 <에놀라 홈즈>는 성장을 주제로 하고 있는 동시에 여성주의를 소재로 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이 강력한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던 시기의 영국이며, 에놀라의 엄마는 이에 저항하는 여성 운동가라는 점과 엄마의 동료 운동가인 이디스가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서도 동생 에놀라가 겪는 어려움과 영국의 정치에 대해서 늘 한발 물러서며 방관자를 자처하는 셜록에게 '당신은 권력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떤 건지 모르죠,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이미 본인에게는 딱 좋은 세상이라서'라고 일침하는 부분, 그리고 튜스크베리家 살인사건의 진범인 튜스크베리의 할머니가 선거법 개정을 막고자 했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라는 사실 등이 그 증거이다.

    백 년도 훨씬 전에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 시작된 여성주의의 날갯짓은 태풍이 되어 21세기의 문화 콘텐츠 시장까지 접수했다. 이젠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가부장제의 폭력적인 억압 아래서 참고만 사는 여성은 더 이상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저항할수록 시대 감각이 뒤떨어졌다는 사실만 분명해질 뿐이다. <에놀라 홈즈> 역시 그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여성주의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극이라는 장르적 특징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여성주의 시대극'을 볼 때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다.

   시대적 흐름으로 인해 여성주의를 소재로 한 콘텐츠는 매우 다양해졌고, 그중 여성주의 시대극은 꽤나 비중이 큰 하위 카테고리이다. <셜록: 유령신부>, <작은 아씨들(그레타 거윅 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최근의 여성주의 작품들은 다수가 현대가 아닌 과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현대보다 여성 억압이 더욱 심했던 과거에서 여성의 저항이 더욱 손쉽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결혼만을 위해 결혼 이전의 삶을 바쳐야 했고 결혼 이후에는 가정과 남편에게 귀속되던 시대에서는 결혼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또 여성에게 선거권조차 없던 시대에서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투쟁하는 것만으로도 여성의 주체성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이러한 요구는 현대에는 이미 달성이 되었기에 현대의 시청자들에게 논쟁을 일으키거나 공격을 받을 여지가 없다. 말하자면 손쉽고 '안전한' 여성주의인 셈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대극 속 여성들이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치는 그들의 투쟁 덕분에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대극을 보며 이제는 양성이 충분히 평등하며 여성들은 이미 오래전에 해방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에 비해 여성의 권리는 많이 향상되었고, 가시적인 차별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여성 억압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이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 역시 다수이기 때문에 이러한 착각은 여성 해방을 저해할 뿐이다.

   여성주의 이론은 현실의 여성들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실천성이 중요하다. 책상 위에서 아무리 멋들어진 이론을 만들어 봤자, 그것이 현실 속 여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대극 속의 '여성주의'는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하위 소재로 채택되어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있어도 현실의 여성들을 실제로 해방하고자 하는 여성주의 이론의 의도가 완벽하게 구현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에놀라 홈즈>를 보며 유도리아가 얻기 위해 투쟁하던 여성 참정권은 현대 여성에게 당연하게 주어져 있다는 것만으로 현재를 무결한 상태로 인식하고 만족하는 것 대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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