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과 다문화 소설로 보는 인류사의 차별과 혐오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는 대기업에 인턴으로 취직하지만, 입사 동기들에 비해 초라한 배경으로 인해 사내에서 차별과 눈총을 받는다. 직장 내 소외를 힘겹게 견디던 장그래를 위로한 것은 다름 아닌 직속 상사 오 과장이 그를 ‘우리 애’라 칭한 일이었다. 내 편은 한 명도 없는 것만 같았던 회사 안에서 자신을 ‘우리’로 인정해 주는 상사의 존재가 그에게는 더없이 큰 위안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주는 단어의 느낌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하다. 우리 집, 우리 팀, 우리 학교, 우리 나라…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나의’ 대신 소유격 관형어로 쓰는 것은 더욱 단단한 소속감과 결속감을 주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곧 우리 바깥의 ‘그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며, ‘우리’ 안과 밖의 차이점이 그 기준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범주를 규정하고 나면, 안팎의 차이는 보다 명료하게 남는다.
영화 <우리들>은 홀로 되기 싫어 ‘우리’가 되고, 그 ‘우리’ 속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고자 애쓰는 열 살 남짓의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나이가 어리고, 그들의 서사가 펼쳐지는 배경이 어느 초등학교의 한 학급과 그 학급의 학생들이 사는 작은 마을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영화가 등장인물 개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미시적 서사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와 ‘그들’의 이분화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보면, 영화에 나타난 갈등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이 행성 위에서 끊임없이 벌어져 온 ‘차별’이라는 비극과 분명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속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과거 수렵ᆞ채집 사회에서 무리로부터 이탈하거나 소외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으며,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을 통해 인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대에도 어떤 집단에 소속이 되어 있는지는 한 개인의 정체성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한 집단에 속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히 본성적인 수준에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과 지아가 가까워진 이유 역시 공통적으로 소속에 대한 결핍과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은 같은 학급 안에 대등하게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없었고, 지아는 전학생이기도 하고 이전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소속, 즉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결핍되어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그 존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가까워졌다.
소속에 대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거부와 혐오 또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다. 이는 자연선택과 경험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선택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질적인 것을 경계하는 유전자가 자연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러한 유전자가 현대까지 남아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의 관점에서 들 수 있는 하나의 예는 식민화 초기 아메리카 원주민의 90%에 달하는 인구가 유럽인들의 정착 100년 이내에 그들이 가지고 온 천연두나 홍역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인류는 이와 유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생존을 위해서 외부인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학습하였을 것이다. 현대에는 세계화로 인한 교류와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타집단과의 접촉이 생물학적인 위협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습성만은 우리의 본성에 깊이 남아 있다.
이처럼 소속에 대한 욕구와 이질성에 대한 혐오는 인류로 하여금 생존을 가능하게 하였던 중요한 본성이며, 이를 무시하고는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두가지 본성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라는 속하고 싶은 욕구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는 경계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차이를 경계로 하여 ‘우리’를 만들고, 그곳에 속하고, 그곳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밀어내려는 습성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성이 본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본성이 통제되지 않은 채로 날뛸 때, 우리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수차례 목격해왔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의해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 일명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자, 인간의 본성이 악으로 치달은 결과이다.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 대학살의 희생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초래한 주범이 당시 독일의 총통인 히틀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다만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질 동안 다수의 독일인들은 그것을 저지하지는 못할 망정 용인하고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동조했는가 하는 의문은 전쟁 후에도 남아 있었다. 이에 독일 출신 유대인이자 현대의 대표적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세계 1차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패배감과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의 강한 ‘우리’에 속하고자 했던 욕망을 그 이유로 제시하였다. 소속에 대한 열망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윤리 체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이를 이용하여 강한 독일, 정확히는 강한 게르만 민족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켰고 게르만 민족을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 주장하였다. 가장 우수한 민족이 있으면 당연한 이치로 가장 열등한 민족도 있어야 했고,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과는 변별되는 이질성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유대인에게 독일을 좀먹는 존재라는 프레임을 씌워 그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나 과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강한 집단에 소속되고자 그 사실을 외면했던 당시 독일 국민들만 본능에 눈 먼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우리들>에서 선과 지아는 따르는 친구들이 많아 학급 내 힘이 센 보라의 ‘우리’에 들기 위해 여러 번 서로의 치부와 결핍을 폭로한다. 지아는 선의 경제적 결핍을 건드리고, 선은 지아의 진실성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 애들이 뭘 몰라서, 아직 덜 배워서 라기에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나 우리의 본성을 닮아 있다.
다문화 시대의 한국소설에서 다루는 문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차별’이며, 이 역시 본성이 통제되지 못한 결과이자 현실을 반영한 현상이다. 앞서 말했듯, 본성을 혼합한 결과인 ‘우리’는 차이를 경계로 형성된다. 슬프게도 이 차이는 손쉽게 차별의 빌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차이의 존재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차별로 곧장 연결되지 않는다. 차별은 차이를 대하는 주체의 태도에서 일어난다. 차이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차이를 이유로 차별을 하는 것, 차이를 없애려는 것, 이주자의 고유성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의 다문화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태도는 차이를 이유로 차별을 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다문화 소설에서 이러한 태도가 나타난다고 과언이 아닌데, 구체적인 예로 이시백의 <새끼야 슈퍼>를 들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평식은 이주노동자를 상대로 슈퍼를 운영하면서도, 그들을 인간이 아닌 가축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며 폭언과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타인을 자신과 대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차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차이가 차별로 대우받는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차이를 없애려는 시도는 베리의 4가지 모델 중 동화에 속하는 박범신의 <나마스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네팔인 카밀과 부부가 된 한국인 신우는 네팔인 이주노동자라는 카밀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가정, 즉 한국인 가정 내의 한 구성원으로만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는 네팔인과 한국인 사이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하여 그것을 없애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카밀을 일방적으로 한국인 공동체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그에게 큰 폭력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카밀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주변화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이주자의 고유성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보편성도 인정해 주는 태도는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소설에서 가장 드문 경우이다. 이는 베리의 모델 중 통합에 해당하는 소설인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서 나타난다. 매매혼이 아닌 명화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와 결혼한 용대는 그녀를 차별하지 않으며, 중국어를 배우려고 시도하는 등 그녀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다문화 사회 내의 차별과 <우리들> 속 주인공들이 보이는 배타성은 가시적으로 변별할 수 있는 차이의 존재 여부의 측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 이주자들을 차별하는 근거는 인종적ᆞ문화적ᆞ언어적 차이이다. 반면에, <우리들>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차이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는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극 초반, 선과 지아가 ‘우리’로 통합되던 시점에 지아는 선의 경제적 결핍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분리되고 지아가 보라와 ‘우리’가 되기 위해 선을 ‘우리’ 외부의 존재로 규정해야 했을 때 지아는 선에게 핸드폰이 없으며, 비싼 색연필을 빌려가 놓고 돌려주지 않는다는 식의 말을 함으로써 경제적인 기준으로 선을 자신과 보라 무리로부터 분리시킨다. 덧붙여 보라는 선과 지아를 각각 따돌릴 때 ‘어디서 냄새 나지 않냐?’는 말을 동일하게 쓴다. 여기서 ‘냄새’는 실제로 이들이 가진 속성이 아닌, 보라 자신이 속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기준이다. 지아와 보라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기준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는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차별을 위해 차이를 가공하거나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차이가 있어서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하기 위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전범자 아이히만을 보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악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초래할지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그가 겪을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는 행위가 악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학살을 묵인하고 그에 동조한 독일 국민과 군인들, 서로에게 어떤 피해가 갈지 알면서도 치부를 폭로한 선과 지아, 이주자들을 차별하는 원주민들 모두 악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속하고 ‘그들’을 규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살펴볼 때, 이것이 아주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타인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을 길러야 하고, 이는 문명과 교육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