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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Mar 12. 2023

알랭 드 보통, '불안'

인간으로서 느끼는 불안, 이를 키우는 것과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본질적인 불안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감정을 느낀다. 그 수많은 감정 중에서는 부정적인 것들도 있고, 그중에는 '불안'이 있다. 내일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느끼는 불안, 차가 막힐 것 같은 불안, 학업이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싶은 불안, 자연재해, 전쟁 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의 불안을 야기한다. 하지만 같은 불안이어도 우리 마음속에 더 깊이 깔려 있는 불안이 있다.


바로 '지위에 대한 불안'이다.


일상에서 다른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불안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기도 한다. 결국 지각을 하지 않아서, 사고가 나지 않아서,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 불안은 사라진다. 그러니 쓸데없는 불안감을 '기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위 불안'은 성질이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기에 느끼는 불안감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으로 남아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이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일단 불안을 없앨 방법이란 건 없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겉으로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은 '사회 속의 내 자리'다. 굳이 사회라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가족, 친구, 동료, 동포, 나아가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나의 자리'를 필요로 한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들에게 기꺼운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나아가 그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를 바라는 게 우리들 인간이다.


문제는 사회 안에서 우리의 자리, 즉 '지위'라는 게 당연한 것, 언제나 변함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우리는 언제든 나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 불안은 시작된다.


사회, 자리, 지위, 이런 식의 이야기보다 사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와닿을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러니 사랑에 대한 결핍은 불안으로 이어진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이 일으키는 불안을 이렇게 포착한다.


"두 번째 이야기, 즉 세상이 주는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보다 더 은밀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다. (중략) 그리고 이 사랑을 이루지 못할 때도 첫 번째 사랑을 이루지 못할 때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여기에도 가슴 아픈 상처가 있으니, 그것은 세상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체념에 젖은 멍한 표정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표현한 첫 번째 사랑은 연인으로부터의 사랑, 성적인 사랑이고 두 번째 사랑은 사회적 사랑이다.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그 집단이 작든 크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불안은 벗어날 수 없는 본질적인 감정이다. 물론 성인에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그 본질적인 문제마저 초월했다고 생각되기에 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로서는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불안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도 책을 여기서 끝내지는 않았다. 원인은 본질적이지만 그 효과는 사람에 따라, 또 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작은 불안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큰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누군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불안을 느껴 '체념에 젖은 멍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불안의 크기를 좌우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지위는 수직적인 개념이다. 그러니 지위 불안은 수직적인 개념이 더 뚜렷하게 될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람 사이의 수직적인 개념, 즉 '비교'다. 더 비교하게 될수록 우리는 더 불안해진다. 비교는 불안을 먹고 자라기에 비교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불안이 더 팽배하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원인으로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그리고 '불확실성'을 이야기한다. 하나하나가 모두 불안을 키울만한 요소이고, 요즘 사회에 가져다 놓고 보면 왜 지금 우리가 더 큰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하게 될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저들의 공통점은 결국 '비교'를 증폭시킨다는 점에 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는 속물근성, 더 나은 것에 대한 기대, 그리고 사람을 하나의 기준에 따라 줄 세우는 능력주의, 그 모든 것들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는 불확실성은 모두 수직적인 개념을 강화한다.


불안을 키우는 것들은 많지만 다시 보면 하나뿐이다. 한 줄 서기가 더 뚜렷한 사회일수록 불안은 더 커진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느끼는 불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인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그 불안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알랭 드 보통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들을 먼저 살펴보면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그리고 '보헤미아'다.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사실 저 다섯 가지가 왜 불안을 줄일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되었는지 알 수 있다.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인들이 결국 하나였듯이, 불안을 줄이는 해법도 한 가지다. '한 줄 서기를 흐트러뜨리는 모든 것'이 불안을 줄이는 방법이다. 순서를 메길 수가 없다면 우리가 지위 불안을 더 크게 느낄 이유도 없다. 지위 불안이 본질적인 만큼 어느 정도의 불안은 느끼며 살아가겠지만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내 순서를 따질 방법이 없다면 그 불안감이 우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커질 수는 없다.


철학은 물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숫자로 메길 수 있는 것들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선호하고, 더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고,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니 철학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줄 세우기가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과 철학은 맞닿아있다. 무엇이 더 예술적인가에 대한 견해는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줄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각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있고, 예술은 그 모든 것을 존중한다. 100명에게 100가지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예술은 한 줄 서기를 파괴한다. 알랭 드 보통이 정치를 제시한 것 또한 기존 지위의 파괴에 있다. 그는 정치에 참여하면서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어 온 것을 예로 들어 정치를 통한 지위의 향상, 이를 통한 지위 불안의 감소를 이야기한다. 물론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방법으로도 지위 불안을 줄일 수는 있지만 예술이나 철학과는 조금 다르다. 예술이나 철학이 줄 세우기 자체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준다면 정치를 줄 세우기는 그대로 있지만 줄 서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기독교라고 쓰여 있지만 크게 보면 '종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속적인 잣대를 가지고 세워 놓은 줄이 절대자 앞에서 의미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종교다. 신 앞에서는 우리 모두 똑같은 존재다.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지 않다. 오히려 세속적인 위치에서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신은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종교를 통해 우리 지위의 무의미함을 깨달으면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헤미아는 무슨 뜻인가 싶을 수 있지만 세속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삶을 의미한다. 나 자신이 스스로 세속적인 가치에 의미를 두고 살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저런 분야를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미 이야기했듯 답은 하나다. 한 줄 서기를 부수든, 전복시키든, 줄이 의미가 없게 만들든, 아예 그 줄에서 이탈해 버리든 결국 내가 이 줄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면 불안은 해결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얼마나 큰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불안을 키우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제는 그 답이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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