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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n 04. 2023

알베르 카뮈, '이방인'

삶의 의미와 허무에 대하여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르겠다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이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죽음을, 심지어 엄마의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삶의 무의미에 빠져 있는 주인공 뫼르소의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 마리와 휴양지에서 보내는 시간, 레몽과 얽혀서 아랍인을 죽이게 되는 일, 그리고 그 일로 인한 재판 과정의 모든 순간에 냉소와 허무, 그리고 무신경한 태도를 보인다.


그에게 삶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사람들과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에서 '왜 그래야 하는가?' 같은 이유를 그는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대응하지 않는다. 뫼르소와 뫼르소가 아닌 사람들에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좋다', '나쁘다' 혹은 사람을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악하냐' 혹은 '악하지 않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또 부조리한 인간 삶에 맞춰주는가, 혹은 맞춰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무거운 일이지만 반드시 슬픔을 보여야 한다거나, 눈물을 흘려야 한다거나, 엄숙한 자리이니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하는 에 뫼르소는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카뮈의 문학이 반항의 문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만큼 이러한 행동을 부조리한 인간 삶에 대한 반항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작중에서 그려지는 뫼르소의 성격을 고려할 때 반항이라기보다 그는 그저 이유가 없는 일에 맞출 생각이 없을 뿐이다. 반항처럼 능동적인 거부보다는 그저 해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한 것뿐이다. 물론 다수의 사람들은 우리 삶의 부조리한 부분, 논리적인 근거가 없는 일을 마주하더라도 통념에 따른다. 튀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뫼르소는 그렇지 않은 인물일 뿐이다. 물론 부조리에 맞춰주지 않는 그의 태도는 그를 사형에 이르게 만든다.


삶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는 그의 말에서 직접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무신경하게 행동할 뿐이다. 그가 반응하는 것은 오직 비사회적인 것, 즉 자연적인 것뿐이다. 작중 배경은 여름인데 어머니의 장례식 때도 그렇고, 아랍인을 죽이는 순간, 그리고 재판 중에도 뜨거운 날씨, 내리쬐는 태양, 덥고 습한 공기에 대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감각적인 것에만 반응하던 뫼르소가 작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밝히는 장면이 있는데 작품의 마지막인 부속 신부가 감옥에 있는 그를 찾아와 신을 믿을 것, 그리고 항소할 것을 권하는 순간이다. 뫼르소는 그의 이야기를 성가셔하며 듣다가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표정은 아주 확신에 차 있네요, 아닌가요? 하지만 당신이 확신하는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여자의 머리칼 한 올의 가치가 있는 게 없어요. 게다가 당신은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어서 살아 있다는 것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어요. 나, 나는 두 손은 텅 빈 모습을 하고 있죠. 하지만 나는 나라는 자아를 확신하고 모든 걸 확신해요. 당신보다 더 확신해요. 내 삶과 장차 다가올 죽음을 확신해요. 그래요, 난 그것밖에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진실이 나를 붙잡고 있는 만큼 나도 그 진실을 붙잡고 있어요. 나는 이성을 갖고 있었고, 아직도 이성을 갖고 있고, 언제나 이성을 갖고 있어요. 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고, 또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어요. 이런 건 했고, 저런 건 안 했어요. 어떤 건 했는데 다른 건 안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그건 마치 내가 언제나 이 순간을, 내가 정당화될 이 새벽을 기다려 왔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어요. 당신도 그 이유를 알고 있어요. 내가 이끌어 온 이 부조리한 인생 동안 내내, 나의 미래 깊은 곳에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월을 가로지르며 나를 향해 올라오고 있어요. 그리고 흘러가는 그 바람은 내가 살고 있는 더없이 현실적인 세월 속에서 주어지는 모든 걸 평등하게 만들고 있어요. 타인의 죽음이, 어머니의 죽음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의 하느님이나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생, 그들이 고르는 운명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단 하나의 운명만이 나 자신을 선택하게 되어 있고, 또 나와 더불어 당신처럼 내 형제라고 자칭하는 수천만의 특권자를 선택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이해하세요? 이해하시냐고요?


이 말을 하고 나서 뫼르소는 해방감을 느끼고 평온을 되찾는다. 삶의 부조리로 인해 냉소적인 삶을 살아가던 뫼르소는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 죽음 외에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서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다. 세상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 뫼르소는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들을 의미 있다고 이야기하기에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냉소적인 삶, 대응하지 않는 삶, 죽은 듯한 삶을 살아왔다. 세상의 의미와 자신이 느끼는 무의미 사이에서 갈등했고, 그의 삶은 그 갈등에 지친 삶이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일, 자신의 죽음이라는 유일한 의미의 무게를 인식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세상이 나와 아주 닮았음을, 결국 형제 같음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내가 행복했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행복함을 느꼈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유일한 실존적 존재로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아 투쟁한다고 말한다. 펜도, 책상도, 의자와 같은 사물도 존재 이유,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생에 걸친 투쟁이다. 기댈 곳이 없는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을 기댈 곳을 찾는다. 누군가는 가족들과의 유대로, 또 누군가는 사회에 기대고, 신에게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뫼르소가 깨달은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은 사실 무의미하다.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찾은 것이지 그것들이 가지는 의미에는 어떤 논리도, 증명도 없다. 유일한 사실은 삶과 죽음 자체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은 삶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그 의미란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처럼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평생에 걸쳐 의미를 찾아 헤맨다. 살아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뫼르소의 깨달음은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말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야 한다면 의 의미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게 무엇이어도 좋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여도 좋다. 돌멩이여도 좋고, 사람이어도 좋고, 신어여도 좋다. 죽을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다고 착각하는 것, 어쩌면 그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뫼르소는 삶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죽을 운명이다. 실제로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은 삶의 허무를 이해한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단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면 의미를 찾아야 하는 부조리함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삶은 의미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 의미를 찾아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생각보다 더 값진 일이다. 실존주의의 귀결은 삶에 대한 허무가 아니라 의미가 되어 주는 삶의 중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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