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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Oct 28. 2023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목적이 없고, 의도가 없는, 무라카미 하루키 상상의 세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는 목적이 없다. 소설을 쓴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언젠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빼곡한 서랍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서 늘어놓을 뿐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런 순수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다.


물론 목적이 없고 의도가 없는 소설을 선호하지 않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지적하고, 가진 자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작가 또한 지식인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이런 목적의식은 한국 소설에서 조금 더 자주 보이는 것 같다. 워낙 고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하루키 소설에는 그런 게 없다. 그리고 그런 '무', 혹은 '순수함'이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작가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서랍을 이곳저곳 열어가며 목적 없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물론 그에게는 어떤 종류의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목적이나 의도를 독자가 직접적으로 느끼게끔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읽는 독자는 부담 없이 그의 이야기를 읽기만 하면 된다. 마치 고등학교 국어 시간처럼 저자의 의도나 모두가 느껴야 할 법한 감상을 찾아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재미있게 이야기를 읽어나갈 뿐이다.


요 근래 나온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그의 소설이 갖는 순수함은 이어진다. 주된 이야기는 지금은 중년이 된 주인공이 소년 무렵 알던 소녀와 함께 그렸던 상상 속의 도시에 대한 것이다. 상상 속의 도시는 벽 밖에는 단각수들이 살고, 벽 안에는 사람들이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고, 문지기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도시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 한다. 뭐 그런, 무라카미 하루키 서랍 속의 도시다. 그 도시와 실제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야기했듯이 상상 속의 도시, 현실, 주인공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에 의도적으로 부여되는 함의도, 목적도 없다. 그저 독자는 그의 상상, 그가 그려내는 추상이 세계에 들어갔다 나올 뿐이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처음 쓰던 무렵 썼던 글을 이제는 다시 제대로 쓸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다시 쓴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이 자주 보여주는 나누어진 세계랄지 추상적인 느낌, 등장인물이 갖는 시크하고 군더더기 없는 성격도 보여준다. 아마 그가 가장 자주 여는 서랍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서술 방식이랄까 글 자체에서는 다른 작품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뭐라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소설과는 좀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면 읽어봐도 좋겠다.


나는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설은 그런 것 없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런저런 삶의 모습, 그게 설령 비현실적일지라도, 그런 모습을 무겁지 않게 보여주고 지나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글은 굳이 소설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다른 방식도 충분히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작가가 훑고 지나가는 삶의 이런저런 모습을 멍하니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자신의 삶과 그 이야기가 부딪혀서 불이 붙을 때가 있다. 물질을 섞어놓으면 자연스럽게 화학반응이 일어나듯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이 작가의 이야기와 충돌해 각자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향도, 인상 깊은 구절도, 독자마다 다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독자들의 감상의 스펙트럼이 넓은 소설, 그런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부딪힌 구절로 끝맺으려 한다. 한 소년이 상상 속의 도시에 있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그 그림자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움직임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해요.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아직 그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서."
마치 봄날의 들판을 뛰노는 어린 토끼처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네 맞습니다". 소년은 내 마음을 읽고 말했다. "봄날의 들판을 뛰노는 어린 토끼처럼, 의식의 느릿한 손으로 붙잡긴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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