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해지는 딸, 흐물흐물해지는 아빠
어김없이 오후 4시가 조금 넘으면 학원에서 마친 딸이 집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하더라도 혼자 학원을 가거나 집에 돌아오는 게 위험하단 생각을 했으나 3학년이 된 지금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잘 다닌다. 물론 아침 등교 전 문 앞에서 차나 오토바이, 자전거가 오는지 좌우를 잘 살피고, 횡단보도에서 절대 뛰지 말라고 매일 같은 잔소리를 잊지 않는다.
오늘은 오후 3시부터 냉장실에 있던 훈제오리고기와 부추를 꺼내 저녁 반찬 요리를 시작했다. 훈제오리고기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부추와 양파를 넣고 굴소스에 볶아 주었다. 남은 부추는 부추무침을 하려다 매워서 먹질 못하는 딸을 생각해 부추전으로 경로를 바꾸었다. 모든 요리의 방향은 딸에게 맞춰진 듯하다.
혼자 있는 오후 12시는 점심 식사 시간이다. 혼자 먹는 점심이라 되도록이면 간단히, 그리고 냉장고 속의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부터 해치우려 한다. 식사를 하며 보는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다. 직장을 다닐 때에는 드라마의 재미를 몰랐는데, 아니, 연속되는 시리즈에 얽매이기 싫어 보질 않았다. 전업 주부가 된 요즘은 드라마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감동이나 슬픈 내용에는 어김없이 눈물도 쏟아내어 준다. 왜 이러나 싶다.
학교를 보낸 오전 8시 반부터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청소도 간단히 하고 무엇보다 딸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다. 집안일이 있으면 집안일로 시간을 보내지만,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왠지 불안하다. 쉬어도 불안하고 TV를 보고 있어도 마음 한 편으로는 불안하다. 물론 십수 년 동안 직장을 다니며 보낸 습관에서 벗어나 남들 일하는 이 시간에 휴식이 주어진 것에 대한 적응이 덜 된 것이라는 걸 머리는 잘 알지만 마음은 아직인 것 같다.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도서관에서 시간도 보내지만, 그마저도 귀찮아 집에 있을 때에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불안에 흐물흐물해진다. 가사와 육아라는 뜻깊은 일을 하고 있지만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 지금은 그 일도 딸의 스케줄에 맞춰 빈 시간에 해야겠다는 생각. 이런저런 생각들이 난무하는 오전을 보낸다.
엄마의 육아도 쉽지 않겠지만, 아빠의 육아도 역시 쉽지 않다. 사회적 시선, 육아의 고민거리를 터놓을 수 있는 이웃이나 모임의 부재, 아니 적극성의 부족. 맘카페는 가입이 안되고 육아대디 카페들은 맘카페만큼 활성화되지 않는 현실. 엄마들 사이에서 묵묵히 하교를 기다리는 쭈뼛쭈뼛한 마음. 한 없이 흐물흐물해지는 시간이 지나고 어김없이 오후 4시가 조금 넘으면 딸이 돌아온다. 가방을 벗어놓고 30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쉬지 않고 하고 있는 딸을 보면, 맞벌이로 엄마 아빠 없는 집에서 혼자 TV 보며 간식 먹는 친구들보단 단단해지는 우리 딸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